말버러 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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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린다는 기사가 신문에 자꾸 나오더군." "맞아. 그런 기사를 읽을 때마다 소름이 끼쳐." "그래서 과감히 끊기로 했네." "대단하네. 담배를 다 끊다니." "아니, 신문 쪽이야."

이런 조크도 요즘 분위기에선 시쳇말로 썰렁해졌다. 금연은 뜻있는 일부의 캠페인 차원을 넘어 이미 사회적인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바로 사흘 전에도 세계보건기구(WHO)는 "매년 4백90만명이 흡연으로 인해 사망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의 담배 회사인 필립 모리스의 간판 제품 '말버러'는 의외로 여성용 담배로 출발했다. 창업자인 필립 모리스는 1847년 런던에서 '여성의 기호품'이란 슬로건으로 이 담배를 팔기 시작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1922년 미국 뉴욕에 진출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초 판매량이 미국 시장의 0.25%에 불과하던 말버러가 7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게 된 것은 레오 버닛이란 인물의 성전환 수술(?) 덕분이었다. 버닛은 '카우보이 캠페인'을 통해 말버러를 남성미의 상징으로 둔갑시켰다. 우수에 찬 카우보이 차림의 사나이가 등장하는 광고는 1975년에 말버러가 세계 담배 시장의 20%를 차지하게끔 도왔다. 요즘도 말버러의 브랜드 가치는 2백억달러 이상이다.

광고에 등장한 '말버러 맨' 중 눈길 끄는 이는 웨인 맥러런이다. 스턴트맨이던 그는 25년 동안 하루 한갑 반씩 피우다가 폐암에 걸려 51세로 사망했다. 말년에 적극적인 금연 운동가로 변신, 필립 모리스사 주주총회에 나타나 "담배 광고를 줄이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지난 14일부터 1백90개국 대표들이 모여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제정 협상을 하고 있다. 담배 광고를 완전히 금지할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다. 금지에 반대하는 나라는 미국·일본·독일 등 몇몇 선진국. 이 중 일본이 특히 소극적이라 해서 국제 시민단체가 15일 일본 정부에 '말버러맨'상(賞)을 수여했다. 일본은 연간 8백35억 개비를 수입하는 세계 최대의 담배 수입국이고, 남성 흡연율(52.8%)도 선진 7개국 중 첫째다.

남성미를 대변하던 말버러 맨은 이제 국제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남성 흡연율 55.1%로 일본보다 한수 더 뜨는 한국에도 말버러 맨은 수두룩하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jaik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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