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7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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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그는 책을 한꺼번에 두어 권 뽑아서 한 권은 슬쩍 가방 가운데로 넣고 나머지만 다시 서가에 꽂는 것이었다. 주인이 다른 손님 때문에 한눈을 팔고 있으면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진열대의 책들을 한꺼번에 두세 권씩 겹쳐서 가방 가운데 칸에 쓸어 넣었다. 그는 내 가방에도 책을 꽂아 주었다. 나는 도무지 가슴이 터져버릴 것처럼 불안해서 얼른 서점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성진이는 오히려 느긋하게 주인이 앉아있는 안쪽으로 다가가서 다른 책들을 열심히 펼쳐 보다가 인사까지 하고 천천히 나서는 것이었다. 택이와 성진이는 나중에 차례로 나의 가출의 동반자가 된다. 어머니는 늙어서도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어서 우연히 사진에 나온 그들을 보자 대뜸 욕부터 나왔다.

- 나쁜 녀석들! 이놈들 요즈음 밥은 먹고 사니?

상급반 아이들과 돌아다니다 가끔씩 문예반의 광길이 종길이를 만나면 그 애들은 너무나 착하고 얌전해서 심심할 정도였다. 그래도 광길이는 부지런히 나를 찾아 다녔고 그 덕분에 종길이와도 자주 만나서 책 읽은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 무렵에 우리는 유일한 월간 시사전문지였던 사상계 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함석헌 노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4.19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맘때에 신문에서는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마산 앞바다에서 건진 김주열군의 시체에 대해서 매일 떠들고 있어서 전 국민과 대학생은 물론이지만 중.고등 학생들도 거의 알고 있었다. 고대생들이 동대문 밖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한 이튿날 시내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학교에서 멀지 않은 경무대로 몰려온 시위대들은 경복궁 돌담 옆을 지나 적선동에서 저지당했다가 효자동 전차종점 앞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점심 시간 직전인 넷째 시간 수업 중이었다. 그 시간이 재미없는 화학 시간이라 얼른 끝나기를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먼저 셋째 시간인가 휴식 시간에 상급생 두 명이 들어와 설명을 했다.

- 지금 선배 대학생들과 우리 고등학생들이 서울 중심가의 곳곳에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앙청 앞에서 경무대를 향하고 있다는데 우리도 동참을 해야겠습니다. 점심 시간이 끝나면 모두 교문 앞으로 집결합시다.

넷째번의 화학 시간에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방씩 딱총소리처럼 들리더니 이윽고 연발 사격을 하는지 타타타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나가자, 나가자, 다급하게 외치기도 했는데 화학 선생은 그 학기에 첫 부임한 젊은 총각 선생이었다. 아직도 학생처럼 보이는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연방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 수업은 마쳐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그가 성실한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에는 한두 사람씩 뒷문으로 나가더니 드디어 우르르 절반 이상이 복도로 나와 버렸다. 무슨 시위에 가담할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 요란한 총성이 무엇보다도 궁금했고 아까 상급생이 들어와 일러주던 말에 조금은 동요되었던 탓도 있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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