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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23. 안성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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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취화선'은 2002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안성기씨는 이 영화에서 조선시대 선비 역을 맡았다.

4년 전 영화 '취화선'을 준비할 때다. 임권택 감독은 주인공 장승업 역에 최민식을 낙점해놓고 선비 김병문 역에는 안성기를 원했다. 나는 바로 안성기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무척 고민했다. 안성기가 누군가.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영화의 대들보 아닌가. 그리고 나와는 인연이 각별했다.

1959년 내가 뭣 모르고 만든 영화 '유정천리'에서 아역 배우로 출연했었고, 84년 어엿한 제작자가 되어 처음 만든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에선 주인공으로 다시 만났다. 이후 '어우동' '기쁜 우리 젊은 날' '꿈' '개그맨' 등 내 영화에서 그는 줄곧 주연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조연급을 부탁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저어기, 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다." "뭡니까, 사장님." "으음, 이번에 임 감독이 영화 준비하는 것 알지?" "네, 들었습니다." "저어기, 뭐냐, 주연은 민식이고, 으음, 네가 조연을 좀 해줘야겠다." "네, 그러죠." "근데, 으음, 너 요즘 (개런티) 얼마 받니?" "○○ 받습니다." "거, 미안한데 말이야, 여력이 없어 그러는데, ○○만 깎자." "네 그러죠."

계약서를 쓰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뜸들일 줄 모르는 나도 그날은 좀체 운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 네" 하면서 순순히 받아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최민식.유호정.손예진.김여진 등 출연 배우들을 불러 임 감독과 회식을 했다. 안성기 외에는 임 감독과 작품을 해본 적이 없어 다들 어려워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안성기의 또다른 면모에 감탄했다. 스스로 나서 중간 다리 역할을 척척 해내는 것이었다. 새까만 후배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먼저 '망가지는' 게 아닌가. 희한한 춤을 추고 노래를 열 곡 넘게 부르고…. 딱딱하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풀어져 임 감독과 어린 배우들이 서로 마음을 트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바로 전화했다. "성기야, 내가 면목이 없다. 너한테 머리가 숙여진다. 지금 바로 영화사로 와라." 나는 먼젓번 계약서를 찢고 깎았던 출연료를 다시 올려 계약서를 새로 썼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자기를 돌보지 않는 배우,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버릴 줄 아는 배우가 안성기라는 걸 새삼 확인한 것이다.

오래 전 한 유명 매니저를 혼내준 적이 있다. 배우들의 개런티를 협상하면서 "안성기.강수연만큼 주셔야죠" 라면서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매니저를 불렀다.

"네가 얼마를 받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성기.강수연을 함부로 입에 올리진 마라. 너희는 TV드라마다 CF다 하면서 1년에 몇 편씩 마구잡이로 출연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아. 배우면 다 같은 배우인 줄 알아?" 며칠 뒤 안성기를 불렀다. "성기야, 너 개런티 더 올려야겠다. 너보다 못한 애들이 그러고 다니는데 자존심이 있지, 한 푼이라도 더 받아." "사장님, 제가 더 받으면 우리 영화가 뭐가 됩니까. 괜찮습니다." 그 말을 듣고 민망해서 혼이 났다.

'국민배우'다 뭐다 하며 안성기에게는 온갖 찬사가 붙어다닌다. 실제로 겪어보면 그런 수식어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배우다. 나보다 어리지만 내가 진정 '존경'하는 인물이다. 영화를 부와 명예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영화인이 얼마나 될까. 안성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한국영화의 자존심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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