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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냄새 나는 TV 보고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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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딸아이의 치아 교정을 위해 함께 치과에 간 적이 있다. 대기실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다 문득 25년 전 미국 유학 시절, 치과에 얽힌 일이 생각났다.

사랑니 때문에 생긴 염증을 치료하고자 공부하고 있던 대학의 치대 부설 병원에 갔다. 진료 접수를 마치자 접수대의 직원이 빠짐없이 기재하라며 설문지 하나를 건네줬는데, 그 설문지는 정말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최근의 병력, 약물 부작용, 주사 알레르기 등을 알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전공인 음악용어도 제대로 다 알지 못하는데, 의학용어라니! 그것도 치통과 함께! 투덜거리며 답안지(?)와 씨름하다가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표기했다가 주사나 약물 쇼크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확실하게 알고 답을 작성해야겠구나'하는 생각에 설문지를 들고 병원을 나와 영한사전이 있는 기숙사로 향했다. 결국 그 설문지의 많은 단어가 영한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의학용어들이라는 걸 발견하고는 다시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주사쇼크로 죽는 것보다는 고통을 계속 참는 게 훨씬 낫겠다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날 나는 다짐했다. 미국에서는 절대로 아프지 말자. 설령 아프더라도 병원에는 가지 말자. 이런 생각에 빠져 혼자 웃고 있는 동안 딸아이의 눈은 대기실 구석에 있는 TV에 고정돼 있었다.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프로그램에 한껏 즐거워하는 딸아이를 보며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의 황금시간은 오락프로그램으로 거의 채워졌다. 힘겹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고 성공한 가슴 뭉클한 이야기는 잠들고 난 뒤나 새벽시간으로 밀려나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들의 아름다운 인생과 희망찬 꿈들은 화려한 오락프로그램에 밀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 동창 모임에서 만난 흉부외과 교수인 친구가 자기네 과에 인턴을 지망하는 의대생이 거의 없다고 걱정하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한편으로는 탤런트 모집에 몇백 대 1의 경쟁이 붙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져보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한 곳으로 편중된 불균형이 계속된다면 10년, 20년 후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TV에는 즐거움이 넘쳐나고, 아프면 치료받으러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혹시 이런 노래가 불리는 미래가 오는 것은 아닌지, 많은 환자가 외국에 가서 필자가 25년 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아찔한 일들을 겪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얼마 전 황우석 박사의 기념비적 성공 때문인지 수의학과의 경쟁률이 몇 배 올랐다는 기사가 났다. 황 박사 같은 세계적 업적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훌륭한 일에 인생을 바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음지에서 묵묵히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 끝없는 학문에 기약 없이 온몸을 불사르는 학자들, 입에 단내가 나도록 힘든 일을 반복하는 근로자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악기와 씨름하는 예술가들, 기업을 살리기 위해 24시간이 아깝다며 뛰는 경영인들…. 이 많은 값진 인생이 TV의 황금시간에 절반만이라도 다뤄진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밝아지지 않을까?

어린 시절 죽어라고 먹기 싫어했던 오이.당근.양파 등을 국에서 건져내다가 어머니에게 많이 혼났다. 억지로 그것을 먹으며 사탕과 콜라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꿈꿨던 내가 이제는 당근.양파를 맛있게 먹으면서 스스로 놀라곤 한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사탕만을 주기보다는, 당장 맛이 없더라도 배워가며 그 진미를 알게 되는 여러가지를 함께 주는 어른이 돼야 하지 않을까?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

◆ 약력: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동 대학원 피아노과 졸업. 추계예술대 음악학부 피아노 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