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파편위 춤사위 깨진 사랑 압축 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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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리투아니아에서 온 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는 연극을 숭배하지 않았다. 그는 연극을 가지고 놀았다. 천진하게, 정교하게, 때로는 도인(道人)처럼 무심하게…. 숱한 소품들이 제각각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며 뛰놀고 있는 무대에는 어느 결에 늙은 남편과 어린 아내의 가슴 저미는 사랑의 듀엣들이 잊지못할 그림으로 흐른다.

지난 2000년, 네크로슈스 '햄릿'의 얼음과 불과 안개비와 기괴한 철제물이 빚는 원시적 폭력성에 열광했던 관객들에게 이번 '오셀로'(지난 3일, 5∼6일 LG아트센터)의 과잉된 지적 유희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신 서정성의 여유가 끼어든다. 연출가는 이번 '오셀로'를 젊음으로부터 소외된 노년의 욕정과 불안으로 해석하는 듯하다.

공연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대사량도 크게 줄었다. 그 대신 연출가는 대사의 숨은 의미와 행간들을 확장시킨다. 의표를 찌르는 배우들의 몸짓과 사물들의 유희는 잠들어있던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관객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열어가게 만든다.

이번 공연의 주된 물질 이미지는 우선 물이다. 공연 내내 무대는 마치 물에 뜬 갑판 위처럼 활기와 불안으로 흔들린다.

천진한 젊은이들도, 폭풍과 파도소리도, 플래스틱 부표도, 늙은 오셀로의 불안한 내면도, 피아노 연주도, 물위에서, 그리고 다양한 물의 메타포들(꽃에 주는 물, 죄를 씻는 물)과 함께 동요하고 있다. 반대로 무대의 중심에서 수심(水深)을 재는 긴 철제의 자(尺)는 오셀로의 굳어있는 늙음의 표상일까. 그는 정서불안의 이아고나 철없는 아내를 자꾸만 철기둥에 붙들어 세우곤 한다.

농부 출신이라는 네크로슈스는 나무로 만든 말구유들을 인상적으로 활용한다. 그것은 함대로, 키스하는 입술로, 노장군의 과거와 운명으로, 영원한 휴식을 취할 관으로 변신한다.

그런데 관객을 더 즐겁고 짜릿하게 하는 것은 이런 사물들의 메타포가 대담하게 결합하거나 엉뚱한 자리바꾸기의 유희를 한다는 점이다. 데스데모나는 고향집의 도어를 등에 업고 춤추며 등장하며 살해 직후 육중한 철제문은 오셀로 대신 눈물을 줄줄 흘리고 베고니아 화분은 그녀의 시체를 대신한다.

사물을 통한 메타포의 과잉은 가끔 관객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사물화될 정도로 완벽한 조형을 갖춘 데스데모나의 아름다운 몸만은 예외였다.

리투아니아의 프리마 발레리나라는 에글레 스포카이테의 길고 우아한 팔다리와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매혹적인 몸짓은 열마디 대사를 대신했으며 1부의 마지막에서 질투에 사로잡힌 오셀로와 순결한 데스데모나가 날카롭게 깨진 접시 파편들 위에서 위태롭게 추는 춤은 공연의 백미이자 극의 주제가 압축된 명장면이었다.

(동국대·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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