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인간적 감동이 '영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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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프랑스의 '스타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70)가 며칠 전 한국을 다녀갔다. '미디어-시티 서울 2002' 초청으로 학술강연에 참석한 그는 '이미지의 연구가'답게 이번에도 '이미지의 폭력'문제를 거론했다. 이미지와 정보의 과잉 속에서 현대인들은 현실감과 존재감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덧붙여 현대 예술은 죽음 직전의 상태인데, 그건 더 이상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술이 넘쳐 흘러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시급히 '성스러운 이미지'로 둑을 세우지 않으면 '싸구려 이미지'의 범람으로 질식하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성스러운 이미지?

지난 2일부터 7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는 인디다큐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국내외에서 엄선한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자리다. 이 중 여성 감독 샹탈 에커먼의 '국경 저 편에서'(2001년작)가 인상적이었다. 미국과의 접경 지대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멕시코인들의 삶을 담은 이 작품은 요란스럽고 찬란한 기법 대신 소박하고 담담한 화면으로 빈곤의 문제를 투시하고 있다. 성스럽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장 뤼크 고다르가 "영화가 죽음을 맞기 시작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수난을 필름에 담지 못한 때부터"라고 했던 주장이 떠오른다. 영화가 폐쇄적인 자기 유희에 빠져 영화 바깥을 망각할 때 자멸을 재촉한다는 섬뜩한 통찰이다.

최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특수효과가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특수효과의 전도사'가 회개한 것일까. 할리우드 영화가 디지털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인간적인 이야기'에서 멀어지고 그래서 점점 추해지는 흐름에 대한 반성이었으면 좋겠다.

기술의 발달이 예술과 항상 상극(相剋)은 아니다. 오히려 운용하기에 따라 풍부한 예술적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건 예술사가 증거한다.

이즈막에 『영화이야기꾼 카를 호프만』(문학동네)이란 신작을 흥미롭게 읽었다. 독일의 인기 작가 게르트 호프만(1931∼93)이 외할아버지 카를 호프만(1873∼1944)을 회고하며 쓴 소설이다. '영화이야기꾼'이란 말은 중어(重語)적이다. 영화 자체가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또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니-. 바로 변사(辯士)다. 작가는 할아버지를 곁에서 지켜 본 어린이의 눈을 통해 변사를 예술가의 범주에 넣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문장에 대해 아주 오래 생각했다…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머리 속에 온갖 미사여구를 담아두고 있었다…할아버지는 늘 사전을 보았다. 어떤 때는 침대에 어떤 때는 화장실에 놓여있기도 했다…할머니는 남편이 빵하나 제대로 못버는 무능한 사내라고 투덜댔지만 '숨가쁜 감정의 거장'이라는 점은 의심치 않았다…할아버지는 늘 자신이 노벨상 수상 작가 파울 하이제(1830∼1914)같은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예술이지만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거기에 못잖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발성기술이 도입되면서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유성영화는 영화도 아니다'라며 헐뜯고 다닌다. 그러나 그도 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는 '몽둥이로 얻어 맞은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스카렛 오하라(비비언 리)가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의 손을 잡고 "우리의 딸 보니가 죽었어요!"라고 말할 때 엄습해 오던 감정의 요동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변사에서 디지털까지-. 불과 1백년만에 영화는 '석기시대에서 우주시대로'에 맞먹는 급변을 겪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연면(連綿)한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 책은 훌륭히 보여준다.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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