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해교전 당시 北 신무기 접하고 자금 전용됐을까 잠 설쳤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 총재는 4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의 산업은행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 '대북 비밀지원 의혹'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발언을 많이 했다.

그는 2000년 8월 취임 후 이근영 금감위원장을 인사차 찾아갔을 때 "한광옥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화해 어쩔 수 없이 현대상선에 대출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嚴씨는 지난 6월 서해교전 당시 '새로운 무기와 화력으로 보강된 북한 함정'에 대한 보도를 접하면서 북한에 지원한 자금이 전용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嚴씨는 지난달 25일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한 국감에서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으로부터 산은에서 빌린 자금을 현대상선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갚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은 여야 의원과 嚴전총재의 일문일답.

-현대상선에 대한 당좌대월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통상적인 사안은 아니다."

-4억달러 지원설을 주장한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과는 아는 사이인가.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다."

-이 문제로 嚴의원을 만났는가.

"(사전)누설이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가. 嚴의원을 정치인들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서해교전 후에 일부 신문에서 적의 함정이 새로운 무기와 화력으로 보강된 것이었다는 보도를 봤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남측에서 지원한 자금으로 무장한 함정에 의해 우리의 장병들이 공격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말로 할 수 없는 고민을 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몇몇 사람과 상의한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면 법적 책임을 지겠다. 지금 누구와 상의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 법적 책임을 질 수사 단계에 가면 밝히겠다."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정부가 갚아야 한다'는 말을 했나.

"그렇다. 金전사장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돈이 북한에 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현대상선이 빌리지 않은 돈을 왜 갚나.

"현대상선은 법적으로 상환할 책임이 있다."

-국정원 대북담당 3차장은 왜 만났나.

"현대상선이 금강산 사업을 하고 있으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3차장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

"현대상선 金전사장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은행으로서는 도무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안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진념 재경부 장관·이근영 금감위원장·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 등과 회의를 했다는데.

"경제 일반에 대한 회의였다. 회의 말미에 이 사안을 이야기했다. 이기호 수석은 '알았다''걱정하지 말라''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김보현 3차장도 '우리가 조치하겠다'고 했다.그 뒤 金전사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2001년 4월 왜 경질됐나.

"공식적으로 들은 게 없다. 물어본 적도 없다. 진념 재정경제부 장관이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 제청권자도 넓은 의미의 임명권자다. 일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불합치가 많았으므로 사표 제출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당시 대북사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남북교류를 확대하는 것에 공감하지만 군사비로 전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대상선이 대출금을 썼다고 보는가.

"안 썼다고 본다."

-처음 누구로부터 보고를 받았나.

"정철조 당시 부총재(현 대우증권 회장)로부터 보고받았다."

-그 뒤 어떻게 했는가.

"그 당시 고민을 좀 했다. 서류를 확인해야 하나 시정조치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직전 총재인 이근영 금감위원장을 인사차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런 사항이 있더라, 정상적인 건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李위원장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민 많이 했다, 그러나 상부의 강력한 지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금감위원장실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방명록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부가 누구인가.

"한광옥 실장이 전화했다고 들었다."

-이근영 위원장과 나눈 대화에 대해 李위원장과 대질신문에 응하겠느냐.

"그렇게 하겠다."

-북한으로 대출금이 가지 않았다면 형사상·민사상 책임을 져야 하는데.

"북으로 갔다고 이야기한 적 없다. 현찰이 들어가고 나면 북한당국이 자유롭게 쓴다.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가는 돈은 정확히 관리돼야 하는데 현대에 투입되는 것이 무질서해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4천억원 지원도 무질서한 것이라고 보았다. 4천억원이 북한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왜 국정원장을 만나자고 했느냐.

"금강산사업을 하는 현대상선의 金사장이 빚을 못 갚겠다 하니까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국정원이 알아야 할 사항이 아니냐 해서 면담 요청을 했다."

-국정원장은 3차장을 만나보라고 했다는데 정황상 북한과 관계되는 문제라는 심증을 가질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면담 요청을 할 때 어느 사항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3차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상부 지시가 한광옥 실장이 확실하냐.

"들은 얘기만 할 뿐이다."

허귀식 기자

ksline@joongang.co.kr

엄낙용 전 총재는

엄낙용(54)전 산업은행 총재는 국제금융과 세금 분야를 주로 맡아온 재무 관료(행시 8회) 출신이다. 현 정부 들어 재경부 차관·산업은행 총재 등 승승장구했으나 지난해 4월 산은 총재 취임 8개월 만에 전격 경질돼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었다. 물러난 뒤에도 별다른 자리를 못맡아 정부의 미움을 샀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신사풍의 용모에 매너가 깔끔해 인상이 좋지만, 의외로 고집이 세 마찰도 적지 않았다는 평이다. ▶경기고·서울대 행정학과 졸▶옛 재무부 경제협력과장·세제심의관, 국세심판소장▶관세청장▶재경부 차관▶산은 총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