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소외"남성 황혼이혼 늘어 할아버지들 '마이 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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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군 간부 출신인 金모씨는 최근 서울가정법원에 이혼 청구소송을 내 이겼다. 60대에 접어든 金씨가 재판까지 하며 이혼하게 된 까닭은 의외로 단순했다. "늙어갈수록 가족들이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金씨는 지휘체계가 확실한 군에서 30년 넘게 생활하면서 평소 가족에게 다소 엄하게 대했다고 한다. 집안의 사소한 일까지 본인이 결정한 것이다.그러나 金씨가 전역한 뒤 많은 게 달라졌다.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부인과 자식들이 집안일을 결정할 때가 잦아진 것이다. 金씨는 "자녀 문제에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을 때 더이상 가장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평생 명예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가족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떠날 수밖에…. 당장 혼자 생활하는 게 어려워 서류상으로만 이혼했지만 조만간 집을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1990년 중반부터 이른바 '황혼이혼'이 유행했다. 얼마 전까지는 가부장적 남편 밑에서 주눅들어 지내던 할머니들이 말년에 자유롭게 살겠다고 이혼을 청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실추된 가족 내 위치나 가족들의 따돌림 등을 참지 못해 결별을 선택하는 '할아버지의 반란'이 늘고 있다.

칠순을 넘긴 吳모씨도 지난달 이혼 청구소송을 냈다. 40여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월급봉투를 빠짐없이 아내에게 맡길 정도로 착실한 가장이었다. 운좋게 아내가 부동산에 투자했던 돈이 불어나면서 동료들에 비해 많은 재산을 갖게 됐다. 그러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다 보니 吳씨는 늘 집안의 '주변인'이었다. 심한 소외감을 느끼던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선택했다. 그는 그동안 겪었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까지 함께 청구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황혼이혼이란 말이 등장한 초기인 97년 60대 이상 이혼소송 10건 가운데 9건은 부인 쪽에서 제기한 것이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남녀 비슷한 비율로 접수된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지난 8월 서울가정법원에서 황혼이혼 결정이 내려진 17건 가운데 남편이 낸 소송이 9건에 이르렀다.

이혼을 염두에 두고 변호사 사무실이나 상담소를 찾는 할아버지들도 증가했다. 최근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朴모(72)씨는 "가족들이 나를 돈을 가진 사람으로만 생각해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아내가 내 명의의 재산을 자신과 자녀 이름으로 바꿔달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朴씨는 변호사에게 "어차피 돈이 없으면 가정에서 내 존재는 의미가 없다"면서 "아내 몫으로 일정 부분을 떼주고 이혼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60대 이상 남성의 상담건수는 97년 69명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2백21명으로 3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상담소 관계자는 "올 연말까지 3백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 의견=김정일(金貞壹)신경정신과 전문의는 "남녀 평등이 강조되면서 전통적 가정문화에서 평생을 보낸 노년 남성들이 심한 박탈감을 갖게 된다"면서 "아내들은 평등권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가장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서구식으로 결혼 초부터 서로의 재산을 명확하게 분리해놓는 것도 노년기의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전진배 기자

allon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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