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신고 84%가 선점 위한 위장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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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달 26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 급발진 사고에 항의하는 사이버모임 회원들이 차량 세대에 나눠타고 건물 외곽을 도는 이색 시위를 했다.

이들이 이런 방법을 동원한 것은 회사측이 상품홍보 캠페인을 한다며 올해 말까지 본사 앞 공간에 집회신고를 미리 해놓는 바람에 차에서 내려 시위를 하면 집시법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현행법에서는 같은 장소에서 두 종류의 집회신고서가 접수될 경우 먼저 접수된 것만 인정한다.

법의 허점을 틈타 다른 사람들의 집회·시위를 봉쇄하기 위한 대기업·단체 등의 위장 집회신고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시위로 피해를 보는 쪽에서는 "영업이나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시위문화가 거칠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서울 용산 미8군 기지 앞에는 올해말까지 보수단체인 자유시민연대의 집회가 신고돼 있다. 물론 대부분은 집회가 열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반미 시위가 열릴 수 없다. 내년에는 진보단체인 전국연합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집회를 1년치나 신고해 놓았다.

이렇게 반대 시위대에 집회를 선점당하면 당사자들은 '1인시위''차량시위' 등 변형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서울 여의도공원의 경우 2004년 7월까지 토요일과 휴일엔 집회를 열 수 없다. 자전거·롤러스케이트 상인들이 영업권 침해를 이유로 이미 이곳에 집회 신고를 해놨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장 집회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현행법에 집회 신고를 할 때 기간·사유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장 집회의 상당수가 '바르게 살기 캠페인''아침밥 먹기 운동''부모 공경 캠페인' 등의 명목을 내걸고 있다.

최근 경찰청이 국회 행정자치위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올들어 7월 31일까지 전국에서 신고된 집회 5천6백여건 중 무려 84%가 열리지 않았다. 이 비율은 2000년(68%)·2001년(80%)에 이어 계속 늘고 있다. 특히 서울·대구의 경우 신고 집회 중 불과 7%만 열렸다.

◇대책=경찰청은 내부 지침으로 집회 신고를 1년 내로 한정하라는 지침을 일선 경찰서에 내렸다. 그러나 이는 별 효력이 없는 행정규칙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집회신고 기간을 합리적으로 축소하거나, 신고만 해놓고 집회를 개최하지 않은 경우 사후 규제를 하는 방안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지나치게 소음을 내거나 경찰 통제에 잘 따르지 않는 시위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윤창희 기자

thepl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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