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 철책선 영화 찍어도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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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지난 14일 중서부 전선의 철책선. 평소같으면 웅웅대는 대남 방송과 간간이 우짖는 새소리만이 긴장된 공기를 갈라놓고 있을 이곳에 민간인들이 소란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바로 영화 '휘파람 공주'의 촬영팀이다. 소총을 둘러멘 인민군이 서성대는 북측 초소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한가로이 '레디-, 액션-'을 외치는 상황이라니, 이전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하지만 이날 촬영팀은 군부대의 호의적인 협조 속에 무난히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한국영화 로케이션에 성역(聖域)은 없다.그동안 한국영화에서 군과 관련된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애로가 많았다.'공동경비구역 JSA'가 판문점에서의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해 억대의 세트를 지어야 했던 것이 한 예다. 이번 '휘파람 공주'도 3개월 전부터 시도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공익을 위한 교양 프로그램 외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거였다. 이에 제작팀은 양평의 한 리조트를 빌려 길을 내고 철책선 세트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국방부가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 "군의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면 촬영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힌 이래 상황이 호전됐다.

<본지 8월 30일자 s4면>

군대뿐 아니라 경찰도 적극적이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오아시스'는 교통량이 많기로 유명한 청계고가도로에서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새벽시간대를 이용했지만 경찰청의 적극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의 호응도 대단하다. 지역 이미지도 높이고 부대 이익도 따르기 때문이다. 경남 남해군에서 90% 이상을 촬영한 '밀애'(11월 8일 개봉)는 촬영 후 세트를 보존한다는 조건만 달고 남해군에서 전액을 내 세트장을 짓고 길을 닦아주었다.부산과 서울은 로케이션을 지원하는 전담기구로 각각 영상위원회를 두고 있다. 이들 위원회의 도움으로 두 도시에서는 1년에 20편 이상의 영화가 촬영되고 있다. 도쿄나 뉴욕 등 대도시의 경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현지 로케이션이 '하늘의 별따기'인 실정을 감안하면 상당한 혜택이다.

이영기 기자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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