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연주를 전담하는, 고대 인도의 신 간다르바(gandharva)에서 유래됐다는 게 정설 아니던가?”
“그건 사전식 정보이고, 제가 좀 창의적으로 해석해볼까요?”
“어떻게?”
“건달은 건괘(乾卦)에 통달한 이를 뜻합니다. 먹고 노는 듯 보이지만 주역 즉 세상사에 훤합니다. 때문에 안색이 나쁘면 건달이 아닙니다. 그건 근심걱정에 눌려 산다는 증거죠.”
한 달 전 동양철학자 조용헌과 나눈 대화인데, 새겨볼수록 호방하다. 모두가 통조림 세상에 갇혀 사는데, 그와 다르게 살려하는 방외지사(方外之士)의 꿈이 살아있다.
그를 만난 건 전남 장성 축령산 자락의 그의 집필실인데, 집 이름도 건달철학을 반영했다. 휴휴산방(休休山房), 쉬고 또 쉬는 집이란다. 7월 말 8월 초는 황금의 휴가 시즌인데, 기회에 휴가·여행이란 걸 다시 생각해본다. 재확인하지만 우린 참 빡빡하게 산다. 쉬고 또 쉰다는 건 먼 꿈이고 실제는 일에 치어 산다. 삶의 정글에서 튕겨져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안다. 그렇게 사는 현대인을 위한 세속종교가 있다면 ‘일상교(敎)’쯤이 안 될까? 일상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세계관인데, 그건 20세기 이후 등장했다. 일상교 분위기를 리얼하게 보여준 게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다.
죽음을 코앞에 둔 1923년 말 그는 연인 밀레나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어른대던 그 순간 카프카는 뭘 생각했을까? 세상 저편의 초월·추상의 형이상학 세계를 노닐었을까? 그가 궁금했던 건 세상사였다. 프라하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담긴 물가인상을 포함한 시시콜콜한 정보들이 궁금했다. 무엇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리웠다. 그렇다. 우리 현대인은 연애하고 자식 낳고 지지고 볶는 일상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일상은 더 이상 비(非)진리나 무의미의 공간이 아니다. 초월을 예비하는 전 단계도 아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내재성 안의 초월’도 일상에 대한 긍정이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불리는 질 들뢰즈를 포함한 현대철학은 한결같이 초월 대신 일상을, 하늘 저편 대신 땅 위의 삶을 강조한다. 서양철학의 오랜 집권 여당이었던 플라톤의 초월·이데아는 실각(失脚)한 지 오래다. 문제는 있다. 일상이란 범속하며, 때론 지루하고 밋밋하다. 그래서 코끝에 바람을 쐬어줘야 한다. 그 역할을 하는 게 ‘일상 속의 이(異)차원’인 연극·문학·미술·음악 등 문화다. 그래서 문화는 일상세계의 꽃이고, 점점 가치를 더해간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