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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獨주역 콜 前총리 조용한 정계은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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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어를 잘 못하는 헬무트 콜(사진) 총리는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는 게 걱정됐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이 충고했다."넥타이 뒤에 할 말을 써놓았다가 읽으시오."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콜은 겐셔의 충고를 따랐다. 콜이 클린턴을 만났다."Nice to see you,100% silk"-콜 농담 시리즈의 최신 버전이다.

지난 12일 오전 독일 연방하원 예산심의 본회의장. 기민당의 '이빨'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원내총무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의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했다."콜 총리 재임 16년 동안 어느 한해도 지난 4년간의 적녹연정 기간보다는 나았다." 기민·기사당 의원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야당 의원 중 박수를 치지 않은 의원은 오직 한 사람, 헬무트 콜 전 총리 뿐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만 보내던 그는 회의가 끝나자 조용히 의사당을 떠났다.

이날 하원 본회의를 끝으로 콜(72) 전 총리가 공식적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7년 간의 주의회 의원과 26년간의 하원의원을 합쳐 43년 간의 의정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요란한 환송행사나 꽃다발도 없었다.독일 언론들의 표현처럼 그는 '조용하고 쓸쓸하게' 정치무대를 떠났다.

독일 현대사에서 콜 전 총리처럼 영광과 좌절이 교차했던 정치인도 드물다. 1959년 29세의 나이에 고향인 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이 된 그는 82년 대망의 총리에 올랐다.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자민당이 반란을 일으켜 어부지리로 총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통해 당당히 총리에 재선됐다.

이미 당시부터 콜 농담 시리즈가 유행할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친숙하고 서민적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몇 ㎏인지 모른다는 육중한 체구와 어눌한 말솜씨, 특히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어 실력으로 그는 늘 화제에 올랐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콜은 치밀했고 저돌적이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아나콘다 재상'. 거대한 뱀인 아나콘다가 먹이를 온몸으로 조여 서서히 죽이듯 한번 그에게 '찍힌' 인물은 재기하지 못했다. 하이너 가이슬러 전 기민당 사무총장·쿠르트 비덴코프 전 작센 주지사 등이 그에게 대들었다가 '팽(烹)'당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정점에 오른 시기는 89~90년이다.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콜은 집요하게 독일 통일을 추진했다. 통합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지적에 대해 "지금 통일열차를 타지 못하면 영원히 못탄다"며 밀어붙였다. 역사는 결국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통일의 업적으로 그는 90,94년 연거푸 총리에 재선됐다. 그러나 불가피했던 통일의 후유증과 경제난은 콜에게 정치적 패배를 안겼다. 온갖 좌절과 쓴맛을 봐야 했다. 잇따라 터진 비자금 스캔들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고 자신이 '정치적 아들'로 생각했던 볼프강 쇼이블레 전 기민당 당수 등 동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비애를 맛보았다. 특히 지난해에는 햇빛 알레르기에 고생하던 부인 하넬로레 여사가 자살해 인간적으로도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거인'이 떠나고 나자 독일 정치권에는 커다란 빈자리가 남았다.'전후 최장수 총리, 독일 통일을 이룩한 재상'의 비중이 너무나 컸던 탓이다.

베를린=유재식 특파원

헬무트 콜 전 총리 약력

▶1930년 4월 3일 프랑스 국경 루트비히스하펜에서 출생

▶1946년 16세 기민당(CDU)공동발기인 정계 입문

▶1958년 하이델베르크대학 졸업·역사학 박사

▶1959년 라인란트팔츠주 주의원 피선

▶1969년 라인란트팔츠주 총리

▶1973년 43세 기민당 당수

▶1982년 사민당·자민당 연립정권 붕괴로 서독 총리 취임(이후 83,87,90,94년 총선 승리로 네차례 연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

▶1990년 7월 고르바초프와 '통일독일 완전주권 보유' 합의

▶1990년 12월 통일독일 초대 총리 취임

▶1998년 9월 총선 패배, 사민당(게르하르트 슈뢰더)에 총리 이양

▶1998년 11월 기민당 당수직 사퇴

▶2002년 9월 총선 불출마(72세,정계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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