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접대비용을 확 낮춰야 : 상대 따라 생산적 '맞춤 이벤트'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한국에 온 지 4개월 된 다국적 제조업체의 미국인 사장 M씨는 얼마 전 '봉변'을 당했다. M사장은 자사가 납품하는 한국 거래처 부장과 우연히 골프 얘기가 나와 주말에 함께 필드에 나갔다. 거래처 사람 세명과 기분좋게 즐겼으나 문제는 계산할 때였다.

M사장은 각자 계산할 줄 알았으나 거래처 사람들은 "덕분에 잘 쳤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식사와 술을 곁들인 2차까지 덤터기 썼다. 회사에선 접대비 처리가 안돼 3백만원 이상을 자기 돈으로 물어야 했다.

한국의 접대문화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지난해 5월 미국계 투자회사인 칼라일그룹의 한국사무소 직원이 '한국의 은행간부들로부터 매일 술·골프 접대를 받으면서 왕처럼 살고 있다'고 자랑한 e-메일 내용이 다우존스 통신을 통해 전세계로 타전되면서 한국의 접대문화는 웃음거리가 됐다. 몇년 전 영국 대외무역청은 자국기업들에 한국에서의 사업 성공 비결로 "접대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음주 실력은 협상 결과와 인간관계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꼽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기업문화 개혁을 요구하면서 불투명한 접대비 처리를 사례로 들었다.

우리의 과잉·밀실 접대문화는 기업들이 '기름칠(접대)을 해야만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행정연구원이 최근 5백개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무원에 대한 금품·접대 제공이 업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응답이 72%나 됐다. 또 여성부가 지난해 직장인 1천명을 조사한 결과 직장인들은 연간 8.7회 접대를 하며 1회 접대에 평균 41만원을 쓰는 것으로 집계됐다. '접대 공화국'이나 다름 없다.

◇접대 권하는 사회=1년 매출이 1백억원인 중소물류업체 K사 柳모(42)사장은 매출의 4% 가량을 접대에 쏟아붓고 있다. 영업마진(9~10%)의 절반 가까이를 접대에 쓰는 셈이어서 부담이 크다. 그는 매주 한차례 정도 A급 거래처에 룸살롱·골프 접대를 한다. 술 접대의 경우 1차 일식집-2차 룸살롱-3차 호스티스 동행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1인당 1백만원을 쓴다. 그는 또 명절 때면 거래처 하급직원에게까지 최소 10만원권 이상 상품권을 돌린다.

柳사장은 "접대비를 쓰는 만큼 가격을 낮추면 수주가 더 잘 될 것이란 얘기는 물정 모르는 소리"라며 "발주업체와 수주업체는 단순한 상거래 관계가 아니라 단골간의 복잡한 유착관계로 맺어진다"고 밝혔다. "발주업체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준만큼 정기적으로 접대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柳사장은 설명한다.

벤처업체 사장인 金모(38)씨는 "대기업으로부터 대형 프로젝트 한두건을 따내 먹고 사는 일부 벤처기업의 경우 수주금액의 10%까지 접대비로 쓰기도 한다"고 밝혔다.

한국식 접대는 투명하지 않은 거래 관행과 의사 결정 구조 때문에 힘을 발한다. 그러나 수출업체인 한솔섬유의 전찬호 전무는 "내부 윤리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미국 바이어들에게 룸살롱 등 과잉접대는 금물"이라며 "오히려 제품에 문제가 있어 과잉접대로 은폐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대기업에서 다국적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옮긴 張모(46)씨는 회사 대리점 사장의 부친상에 국내기업 관례에 따라 30만원의 조의금을 내고 접대비로 처리했으나 징계를 당했다. 꽃 한다발만 전달하도록 돼 있는 회사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진국 기업은 도를 넘는 접대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문제는 경쟁력 저하=왜곡된 접대 행태는 공정경쟁을 막는다. 접대에 발목 잡힌 발주처는 좋은 제품을 싸게 구입할 기회를 놓치고, 과다하게 접대비를 지출한 수주업체는 수익성이 떨어진다. 수주 경쟁업체는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제품을 제공할 기회를 박탈 당한다. 시장경제 논리에 반하는 것이다.

실제로 조세연구원이 6천여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 접대비가 증가하면 매출이 늘어나는 효과는 있으나 순이익은 오히려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우리 접대문화는 높은 투명성을 요구하는 국제 관행에도 어긋난다. 냉혹한 품질·가격경쟁이 이뤄지는 국제 거래에서 거래처와의 인간관계에 매달리는 기업은 살아 남을 길이 없다.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척도인 투명성(국제투명성기구 조사)에서 한국은 싱가포르·홍콩·일본 등 경쟁국에 한참 뒤진 40위에 머물러 있다.

곽수근 서울대 교수는 "접대비 명목으로 공금인 회사 돈을 개인 용도로 쓰는 도덕불감증도 만연한 상태"라며 "결국 기업과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간다"고 말했다.

◇대안=기업·공무원 사회의 내부 통제시스템을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자입찰제 등을 도입해 투명한 거래 관행을 확립하면 불요불급한 접대비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접대 방식을 바꿔 선진국 기업처럼 다양한 접대 방법을 동원하면 비용을 절약하고도 더욱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조 향영리스크컨설팅 대표는 "세계적 기업인 삼성전자가 지난해 말 내부감찰을 통해 접대를 받은 직원을 중징계하는 한편 접대한 납품업체까지 거래를 끊었던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며 "기업은 우선 접대 윤리규정을 만들어 위반하는 직원과 관련업체에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정표 건국대 교수는 "기업 내부에서 영수증을 꼼꼼히 챙겨 필요한 접대와 과다한 접대를 따지는 시스템부터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훈·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