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액 많을수록 좋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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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나라 경제가 다급한 상황에 빠질 경우에 대비해 쌓아두는 외환보유액이 1천억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계속 늘고 있다.

8월 말 현재 1천1백65억달러로 일본·중국·대만에 이어 넷째로 많다. 1997년 말 한국은행 금고에 달랑 39억달러가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같이 많은 외환보유액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외환을 쌓고 유지하는 데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넉넉한 외환보유액으로 높아진 대외신인도가 비용 이상의 효과를 낸다고 주장한다.

◇비용도 꽤 들어=외환보유액 중 한국은행이 외환위기 이전에 시중은행에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은 5백억달러와 보유 외환액을 굴려 얻은 수익 2백50억달러는 이자가 다 나가지 않는 돈이다. 그런데 환란 직후 해외에서 발행한 40억달러를 비롯, 그동안 총 17조7천억원(1백50억달러, 7월 말 현재)어치의 외국환평형채권(외평채)을 팔아 달러를 조달했다. 그 이자가 지난해 2조4천억원에 이르렀다.

"더 이상 외환보유액 확충을 위해 외평채를 발행할 계획은 없다. 하지만 환율의 급격한 변동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외평채라는 수단을 활용하는 게 불가피하다. "(이상헌 한국은행 국제국장)

올해 원화 가치가 급등(환율은 낮아짐)하자 정부는 4조6천억원어치의 외평채를 발행해 달러를 사들였다. 또 이달 중 4천억원어치를 더 찍으면 올해 발행한도가 소진되므로 국회에 5조원어치를 더 승인받을 계획이다.

일부러 늘리려 하지 않아도 외환보유액은 그만큼 늘어날 판이다.

외평채를 통한 조달분을 뺀 나머지 2백65억달러는 대부분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사들인 것이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 한국은행이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해 흡수하는데, 여기서도 이자가 발생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통안증권 발행 잔액 86조원 중 상당 부분은 외환보유액을 쌓는 데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많이 쌓자 다른 데서 인정=환란 직후 투자부적격 등급까지 떨어진 국가신용등급을 올 3월 무디스를 필두로 피치(6월), S&P(7월)가 줄줄이 A등급으로 올렸다.

'1천1백20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으로 대외 충격에 대한 대응 능력을 확보했다'(S&P)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대외신인도가 회복되자 외평채(달러 표시)가산금리가 사상 최저로 낮아지고 금융기관과 민간기업의 해외차입 여건도 좋아졌다.

"신용등급이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연간 이자비용이 5억달러(약 6천억원) 줄어든다. 이자 감면보다 국가 이미지가 좋아져 수출과 관광객 증가 등 경제 전반에 큰 플러스 효과를 내는 점이 더 중요하다."(권태신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이같은 논리 아래 정부는 앞으로 2~3년 동안 외환보유액을 꾸준히 늘려갈 태세다.

◇얼마가 적정한가=정답은 없다. 대개 석달치 수입대금 지급액(약 4백50억달러) 또는 1년 안에 만기가 돌아올 단기 외채(약 4백77억달러)이상을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기준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9월 단기 외채에 외환위기가 터지면 국민들이 빼내갈 자본을 합쳐 한국의 경우 6백50억달러가 적정하다고 권고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투자 자금(8백억~9백억달러)에 통일에 대비한 비용(연간 2백억~3백억달러)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적어도 1천억달러, 그 이상이어도 좋다는 것이다.

차백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에 대한 신뢰도가 아직 완전 회복됐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외환보유액을 1천억달러 이상으로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면서 "그래도 규모가 커진 만큼 미국 재무부 채권을 사는 등 안정성을 따지는 투자에서 벗어나 수익성을 높이는 방안을 찾을 때"라고 지적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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