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20. 장선우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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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1994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화엄경"으로 경쟁 부문 본상을 받은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아역배우 오태경, 필자, 장선우 감독, 배우 신현준씨.

누가 "영화 제작자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선주(船主) 같은 사람"이라고 답한다. 선주는 고기잡이 배가 항구를 떠나기 전까지는 모든 책임을 지지만 일단 바다로 나가면 선장에게 바통을 넘긴다. 바다에서는 선장이 모든 걸 관장해야 한다. 선장은 물론 감독이다. 제작자로서 나는 촬영에 들어가면 감독에게 전권을 넘긴다. 그러나 딱 한 번 이 원칙을 어긴 적이 있다.

1993년 '화엄경'이 완성됐을 때다. 상영 시간이 2시간20분이나 됐다. 불필요한 부분이 많아 보였다. 장선우 감독을 불렀다. "한 20분만 자르는 게 어때?" "안 됩니다. 영화 흐름을 보면 그냥 둬야 합니다."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나도 물러서기 싫었다. 주변에 물어봐도 길다는 의견이 많았다. 내 독단으로 필름을 자르기로 마음먹고는 편집기사까지 불렀다. 그러나 막판에 마음을 바꿨다. 다시 편집한다고 관객이 더 든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 "이태원 사장은 감독을 믿어준다"는 그동안 쌓아온 '명예로운' 평판에 흠집을 내기도 싫었다.

개봉 날 아침 대한극장 앞을 가봤더니 걱정했던 대로 썰렁했다. 밤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저 장선웁니다." "응, 웬일이야?" "사장님, 영화를 20분정도만 잘라야겠습니다." "뭐? 됐어, 이 사람아. 그냥 그대로 가!" '왜 진작 내 안목을 안 믿어 줬나'라는 생각이 들어 야속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90년 무렵이었다. 이름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5공화국 때는 문공부에서 영화계 블랙리스트를 제작사에 돌렸었다. '이 사람들과 절대 영화를 만들지 말라'는 통보였다. 그 일곱 명의 명단을 책상 유리판 밑에 넣어뒀는데 첫머리에 올라 있는 이름이 장선우였다.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이른바 운동권 출신 감독이었다. 87년 6.29 선언 이후 그도 메가폰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나를 만나기 직전에 만든 작품이 '우묵배미의 사랑'이었다. 그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그의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처음엔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호의 발자취를 좇아 북한에도 들어가 찍겠다는 것이었다. 북한과의 교류가 막 물꼬를 트던 때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했다. 이북 출신인 나로서는 여전히 북한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만났더니 하일지가 쓴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책을 내게 건네주었다. 처음 몇 페이지만 읽고 팽개쳤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나 뭐라나 하는 데 도통 스토리가 없었다. "이런 걸 어떻게 할래?" 했더니 "지식인의 가식을 비판하는 게 재미있지 않습니까?" 했다. 자기도 '먹물'인 주제에 지식인을 공격하겠다니, 그 박력이 마음에 들었다. 문성근.강수연 주연의 '경마장 가는 길'에 매우 만족했다. 흥행도 잘 됐다. 재능이 뛰어난 친구였다. 바로 다음 작품을 준비시켰고 그게 '화엄경'이었다.

'화엄경'은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본상(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받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영화제에 갔을 때와는 달리 3년 새 한국영화가 부쩍 성장한 걸 알 수 있었다. 현지 대접도, 영화 때깔도 훨씬 좋아졌다. '아제아제…' 때는 현상.녹음.자막이 형편없어 창피할 정도였는데 3년 만에 외국영화에 손색없는 수준이 됐다. 편집 문제로 속은 썩었지만 해외 국제영화제에서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긴 작품이 '화엄경'이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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