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루사'한반도강타]물빠진 강릉은 거대한 진흙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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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15호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지난달 31일 하루 동안 8백70.5㎜의 비가 쏟아졌던 강릉 지역은 1일 오전 도심을 휩쓸었던 빗물이 대부분 빠져나갔지만 수마가 할퀴고간 상처는 너무도 끔찍했다. 침수지역 주민들의 피해는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고 도시 전체에 진흙칠을 해 놓은 것 같았다. 도로도, 농경지도, 가옥도 모두 황토빛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도 유분수지. 하루 밤새 어찌 이럴 수가…." 31일 오후 6시쯤 저녁식사를 하다 말고 부인과 함께 몸만 집에서 겨우 빠져나온 최규돈(70·강릉시 홍제동)씨는 "가슴까지 차는 물을 헤치고 1㎞쯤 떨어진 시청으로 겨우 몸을 피했다"며 "목숨을 건져 그나마 다행"이라고 몸서리쳤다.

강릉시 장현동 43통 3반 20여가구 주민들은 장현저수지 일부가 붕괴되기 직전 대피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1일 오전 마을을 찾은 주민들은 마을 초입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20m 물 건너로 유일하게 형체가 남아 있는 보건환경연구원 건물과 흙속에 묻힌 집터를 망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 마을에서 혼자 살던 이재우(86)할머니는 "자식들이 해준 패물과 현금을 챙겨나오지 못했다"며 "아무리 둘러봐도 살던 집 지붕이 보이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1일 오후 마을 대부분이 침수됐던 노암동·성덕동·내곡동 일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파손된 가옥 자재와 흙더미에 덮인 차량들이 마을 곳곳에 널려 있었으며 골목길은 온통 황토길이었다. 삽과 손 등으로 진흙을 치우는 주민도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복구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경포천이 범람하면서 경포해수욕장 진입도로 여러곳이 유실됐고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1일 오후 늦게까지 선교장 앞 도로가 물에 잠겨 1백여가구 주민들이 이틀째 고립된 채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1일 오후 늦게까지 7번국도·동해고속도로·35번국도 등 외지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는 산사태와 도로 유실 등으로 차량과 사람 통행이 두절됐다.

그러나 영동고속도로는 이날 오전 11시쯤부터 상행선에 한해 통행이 허용됐고 오후 6시30분부터 하행선도 통행이 재개됐다. 철길 곳곳에서도 산사태가 발생해 강릉~동해간 영동선 철도 운행이 이틀째 중단됐다.

교동 택지개발지구와 성덕동·강동면·옥천동·노암동 등 강릉 대부분 지역 주민들은 지난달 31일 오후 7시부터 정전·단전 사고가 잇따라 암흑 속에서 불안한 밤을 보내야 했다.

광케이블이 유실되면서 1일 오후 늦게까지 시외전화와 휴대전화, 인터넷망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강릉시 상수원 공급처인 홍제동정수장에 이르는 직경 8백㎜ 원수 유입관이 3백여m 유실되면서 31일 오후 11시30분부터 강릉시 전역에 수돗물 공급이 이틀째 전면 중단돼 많은 시민들이 극심한 불편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경기 지역에서 차출한 소방 급수차 21대와 강릉소방서 소속 급수차 10대를 동원, 2일부터 비상 급수에 나설 계획이다.

한편 강릉시는 1일 현재 기습 폭우로 26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으며 8천3백여채의 가옥과 1만1백여㏊의 농경지가 피해를 본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강릉=홍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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