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권 담보로 은행대출 지식정보 시대 실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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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출판인 전병석(66·문예출판사 대표)씨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 수요일이었다. 전화 목소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조기자, 정말 기분 좋은 일인데 함께 기뻐합시다." 국민은행 측이 중견 출판사인 한길사에 20억원을 신용대출했고, 그것이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의 국내 출판권을 가진 회사의 기획력 등 무형의 자산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전례없는 결정이라는 소식을 막 듣고난 뒤 반가운 마음에 걸었던 전화였다. '걸어다니는 출판역사'로 통하는 그 분의 설명이 쏟아졌다.

"예전 1977년도의 일이죠. 굴지의 학습서 출판사인 민중서관이 부도 직전에 몰렸어요. 주거래은행이 조흥은행이었는데, 건물을 담보로 한 대출액이 한도액을 넘은 상황이었죠. 그러면 수백종 책의 출판권을 담보로 추가대출을 해보자는 쪽으로 얘기가 전개됐죠. 실무선에서의 그 얘기가 경영진에서 뒤집어졌고, 그렇게해서 민중서관은 문을 닫았죠. 을유문화사와 함께 단행본 출판의 쌍벽이었던 정음사 등도 자금난으로 차례로 사라졌죠. 그런데 이제 세상은 바뀌고 있는 겁니다."

보수적 금융관행을 몇 단계 뛰어넘은 국민은행의 그 결정을 마치 당신의 일인양 흥분하는 전 대표는 출판계 중진·원로 그룹의 주요 멤버. 올해 나이 92세인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의 뒤를 이어 70대 그룹에 속하는 한만년(77·일조각)· 김성재(76·일지사)씨의 뒤를 잇는 출판계의 장로(長老)에 속한다.

따라서 굳이 자기 출판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사안에 대한 그의 흥분은 이번 대출 건에 담긴 출판사적 무게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평가대로 국민은행의 대출은 과연 피터 드러커가 말해온 지식정보 시대의 도래를 실감케 해준다. 아마도 그 원로는 옛날 생각이 났을지도 모른다. 활판인쇄 시절, 그러니까 지적 재산권이란 말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인 그때에 전당포에 시계·반지를 맡기듯 지형(紙型)을 맡기고 사채를 쓰던 그 시절 말이다.

변화된 이 시대 제조업이자 콘텐츠산업인 출판에 대한 자부심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진화는 건너뛰는 법이 없다. 가장 문화 마인드를 갖췄다는 하나은행의 행보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해 전 땅이나 건물 등 부동산이 아닌 미술작품을 담보로 대출을 국내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은행이었다. 물론 미술작품 담보대출은 아직은 보편화가 되지 않았다. 또 기업이 소장한 미술작품을 업무용 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외국의 세무행정이나 선진금융 수준까지는 넘어야할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은행에 이은 국민은행 측의 이번 신용대출 결정은 그만큼 고무적인 것도 사실이다.

알고보면 그 결정은 혁신적 결정인 만큼 허점도 없지 않다. 내규 마련에 앞서 대출부터 전격결정했던 은행 측이 지적 재산권의 근저당 설정에 관한 내규를 뒤늦게 준비할 정도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확정될 경우 다른 은행들에 파급도 기대할 만하다. 또 모든 게 순조로울 경우 그동안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대형 출판기획물 등도 쏟아질 것이라는 예측은 즐거운 상상만이 아니다. 그 경우 우리 사회의 문화 역량이 축적되는 결과이니 과연 즐겁다. 책 기획의 컨셉트만 확실하고, 과학적 수요예측이 따라준다면 얼마든지 근저당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번 결정은 출판계에 어떤 과제로 연결될까. 마침 그 얘기가 생각난다. 94년인가의 일이다.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씨가 자전적 경영서 『소프트웨어의 세계로 오라』의 출판 건 때문에 김영사 관계자들과 만났다. 화제가 매출액 쪽으로 번졌다. 사람들이 물었다. "김영사라면 메이저급인데, 한해 매출액이 어느 정도일 것 같습니까?" 이씨가 서슴없이 "5천억은 안될까요?"고 되물었다. '0'하나를 빼야된다는 귀띔을 받고 그가 던진 말이 이랬다. "에이, 5백억원 정도라고요. 말이 안되죠."

밝히지만 당시 김영사 매출규모는 50억원(지난해 매출액은 1백50억원 규모임)이었고, 5천억이란 국내 단행본 매출액(교과서나 참고서, 전집물 제외)의 총규모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어쨌거나 그 에피소드는 무엇을 말해줄까?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은 출판업에 대한 이미지, 혹은 출판물이 창출해내는 부가가치가 그만큼 크고 높게 잡혀있음을 상징하는 일화다. 그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이야말로 이 시대 출판종사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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