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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네 번째 태어나는 광화문, 온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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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호 18면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가혹한 끌과 무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이제는 멀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너를 구해 낼 수는 없다.”

대원군 때 모습 그대로 부활 8월 15일에 현판 제막식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본 민예잡지 ‘개조(改造)’(1922년 9월호)에 발표한 글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제목은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였다. 총독부를 두려워한 국내 언론이 광화문 철거에 반발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온 일본 지식인의 목소리는 일본과 조선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는 총독부 청사를 가리는 광화문을 1927년 기어이 헐어 버렸다. 다만 반대 여론을 감안해 경복궁 동편, 현재의 민속박물관 북쪽에 옮겨 세웠다. 이로써 대원군이 1865년 중건한 광화문은 불과 60여 년 만에 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광화문은 태조 4년, 1395년에 창건됐다. 신생 조선왕조의 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워졌다. 첫 이름은 정도전이 명명한 사정문(四正門)이었으나 세종 때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꿨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0여 년간이나 조선 민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조선 말,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광화문도 옛모습을 되찾았으나 태조의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탈에 의해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세 번째 광화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웠다. 박 전 대통령은 외국 귀빈들이 구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보고 “저 훌륭한 건물이 뭐냐?”고 묻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니 광화문을 복원하면 역사적 의미도 있고 총독부 건물도 가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원군의 광화문이 총독부 건물을 잘 보이게 하려고 옮겨졌다면 박정희의 광화문은 총독부를 가리기 위해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으니 역사의 이이러니다.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문루가 파괴된 상태였다. 박정희 정부는 석조기단을 옮기고 상단의 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다. 언론과 전문가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군사정부는 돈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1968년 12월 12일에 열린 준공기념식에서 자신이 직접 쓴 한글 현판을 걸었다.

그러나 이 문은 시멘트 건물로는 제법 잘 지은 전통건축이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광화문은 근정전·근정문·흥례문을 잇는 축선에 위치해야 하지만 새 광화문은 당시 도로의 축선에 맞춰 반시계 방향으로 5.6도 기운 방향에 북쪽으로 14.5m, 동쪽으로 10.9 m이동한 위치에 지어졌다. 또한 원래보다 1.5배 크게 지은 것도 문제였다. 박정희의 광화문은 단명으로 끝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21세기에 네 번째로 세워지는 문은 대원군의 광화문을 복원했다. 현판도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책임자였던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글씨를 디지털로 복원해 건다. 세종대왕이 고른 이름 ‘光化’는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이다. 광화문의 복원이 부디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현판 제막식은 8월 15일 광복절에 열린다.

사진은 24일 오후 광화문 복원공사 현장 덧집을 철거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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