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者의 미학' 내 건축의 주춧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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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관람객들이 숨죽이며 조용조용 발걸음을 옮기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제 1전시실이 공사장으로 변했다. 뚝딱거리는 망치,'윙' 하고 돌아가는 전기톱 소리로 건축 현장 저리 가랄 정도로 시끄럽다.

그 소음들이 잦아드는 곳에 집이 한 채씩 모습을 드러낸다.4백50평 전시장이 도시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 사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거긴 좀 높여" "더 이쪽으로"를 외치는 이는 종합건축사사무소 '이로재'의 승효상(承孝相·50) 대표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오광수)이 선정한 2002년도 '올해의 작가'인 그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건축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건축전 하면 설계 도면이나 모형 몇 개 놓고 해설 죽 붙여놓은 걸 떠올리잖아요. 전 미술관 전시장을 새로운 땅으로 생각하고 제가 그리는 이상적인 도시, 우리 시대에 마땅한 도시를 구현했어요. 평등하고 다원적인 도시, 달동네에서 볼 수 있는 집과 길."

28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열리는 '올해의 작가 2002 -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가로는 처음 '올해의 작가'로 뽑힌 승씨의 건축세계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도록 꾸린 전시회다.'비워진 도시(Urban Void)'라는 전시 제목에 승씨의 건축관이 드러나 있다. 그는 "꼭두새벽 곱게 빗질을 하고 난 절집 마당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한·중·일 세 나라의 마당을 비교해보면 참 재미있어요. 중국은 주인과 하인이 쓰는 마당이 구분돼 있는 계급적인 마당입니다. 일본의 마당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쳐다만 보는 '죽은 비움'입니다. 이 둘에 비하면 한국의 마당은 아무나 드나드는 '무목적에 가까운' 곳이지요. 우리 민족은 원래 광장이 필요없어요. '길놀이'라 할 때의 바로 그 길, 골목, 비어있던 마당이 나눔의 구실을 다 해줬거든요. 그런 길을 어떻게 건축 속에 집어넣을 것인가가 제 관심사입니다."

그는 건축이 개인의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집이 "누구나 임시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고 있다고 걱정했다.

"한국 사람들은 '건축'하면 평당 얼마 하는 부동산이나 몇 층짜리 건물을 떠올려요. 건축의 창조성은 사라지고 소유와 소비만 따지는 거죠. 건축이 보는 게 아니라는 걸 깨우쳐주고 싶어요. 건축은 공간에 관한 '생각'이고, 사람들이 사는 '얘기'며, 사물을 올바르게 쳐다보는 '인식'입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시는 '계급적 도시'라고 설명했다. 강남과 강북으로 갈리고, 내 땅과 네 땅을 따지며, 높이와 평수를 견주는 도시는 "얼마나 팍팍한가"라고 그는 탄식했다. 그가 전시장에 지은 16채 집은 서로 부딪히며 골목길을 따라 사이좋게 어깨를 겨눈 모습으로 솟아났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집과 집은 손잡은 친구처럼 이어진다. 그가 즐겨 쓰는 마감재인 나무와 코르텐(내구성 강판)은 시간이 흐르며 저절로 퇴화하는 재료로 싸고 자연친화적인 재료들이다.

승씨가 지난 20여년 견지해온 '빈자의 미학'이란 건축론은 이런 뜻에서 왔다.

"한마디로 돈이 있어도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미학입니다. 물질 만능주의·천민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거지요. 현실에 애정과 집착을 품고 주변의 맥락을 포함한 집을 짓는다는 얘깁니다. 한국 건축이 지금은 세계의 변방에 있지만 좋은 자원과 뛰어난 인력이 많은 걸 보면 한 번 세계 건축계 중심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커요.'빈자의 미학'이 21세기 건축사를 흔들지도 모르죠."

승씨가 작업하는 서울 동숭동 사무실 이름 '이로재(履露齋)'는 '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이다. 건축사무소라 뭔가 심오한 뜻인 줄 기대하고 왔던 동료들이 "밤샘을 밥먹듯이 한다는 얘기였군"이라며 옆구리를 찌르더라고 그는 빙그레 웃었다. 02-2188-6038.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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