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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파워 소프트 코리아] 3. 소프트 파워를 읽는 이어령과의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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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Q 우리 영화는 외환위기의 불황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도약했다. 그런 역설적 현상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나.

A 우리 경우만이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 때의 뉴욕 거리에는 두 행렬이 생겨났다. 한 줄은 무료 급식소 앞에 늘어선 '수프 라인'이었고 또 한 줄은 '아메리칸 팬터지'로 불리는 킹콩.타잔, 그리고 미키마우스를 보려고 몰려든 관객 라인이었다. 객석 6200개의 초대형 극장인 라디오시티가 탄생한 것도, 젊은이들이 주크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베니 굿맨의 연주에 절규하며 거리에서 춤추는 '스윙 에이지'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흔히 이런 현상을 불황의 그늘로부터 탈출하려는 현실 도피적 풍조로 풀이한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실직자들에게 가장 값싼 소일거리가 영화관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는 미국의 불황이 엔터테인먼트와 산업 디자인의 혁명을 일으킨 것에 비해 독일의 경우에는 나치의 등장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불황이 문화와 손을 잡으면 필요(Needs)의 경제가 욕망(Wants)의 경제로 바뀌고 권력에 이용되면 민주사회가 독재체제로 바뀌게 된다는 교훈이다. '문화예술의 꽃은 겨울의 빙벽 위에서 핀다'는 문예 사회학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일본 역시 십년 불황을 메운 것은 문화였다. 그래서 일본은 경제 대국에서 문화 대국이 되는 진짜 강국이 되었다고들 한다.

Q 한국 영화산업의 비약은 2000년대의 벤처 캐피털과 맞물려 새로운 투자 방식과 제작 혁신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문화산업은 일종의 모험이고 도박인가.

A 산업적 측면에서 볼 때 문화 예술은 모두가 벤처다. 피카소가 되면 침실이 40개나 되는 성곽에서 살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리의 지붕 밑 방에서 굳은 빵을 먹는 것이 화가의 길이다. 벤처라는 말은 이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한다. 무역선에 싣는 상품들을 그렇게 불렀다.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대박이고 도중에 풍랑을 만나 뒤집히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벤처 동물이다. 모든 동물은 불이 무서워 피했으나 그 위험을 이용해 문명을 만든 것이 인간이다. 예술가의 경우처럼 순수한 창조의 욕망을 지니고 목숨을 걸 때 비로소 벤처기업은 성공한다. 스톡 옵션에만 매달려 초창기의 벤처 마인드를 상실한 것이 실리콘 밸리의 쇠퇴를 초래했다는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Q 우리에게는 열정만 갖고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영화산업의 쓰라린 경험이 있다. 불황기를 극복하는 영화산업의 전망은.

A 세상에 주먹구구로 되는 일은 없다. 할리우드와 실리콘 밸리를 합쳐 '실리우드'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기업형태를 상징하는 키워드다. 벤처로서의 문화산업이 옛날 같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에서 벗어나 '로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나가려면 불 같은 예술의 가슴에 얼음처럼 찬 기획력과 기술력의 머리가 뒤따라야 한다. 영화산업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비디오.캐릭터.게임.애니메이션, 그리고 모든 엔터테인먼트와 연계돼 있다. 문화산업의 소프트 파워는 서로 다른 사업 간의 네트워크화로 발전된다. 정치.기업.교육 등 모든 분야가 매뉴팩처러에서 프로듀서의 영화산업 모델로 바뀌어 가고 있다.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도 이제는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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