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년만에 '금녀의 벽' 깬 이은진씨]"기차 내 사랑" 처녀 여객전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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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금녀(禁女)의 벽'은 깨지라고 있는 것 아닌가. 1백3년 철도사(史)에 처음으로 여객전무가 된 이은진(恩眞·27)씨. 지난 6월 여객 전무 시험에 수석 합격한 그는 '남자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여객 전무직에 당당히 지원했다. "남들이 안하는 일을 해 볼 기회가 어디 쉽게 생기나요." 몸매는 가냘프지만 그의 말투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 듯 또박또박하다. 여객 전무는 열차 안에서 손님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불편을 해결해 주는 등 객실 서비스를 총괄한다. 객실을 담당하는 직원 3~4명 가운데 최고 책임자다. 그는 요즘 청량리~강릉, 청량리~춘천 무궁화호 열차의 객실 업무를 번갈아 맡고 있다. 지난주 강릉역에서 그를 만나, 함께 청량리행 기차에 올랐다.

#1.기차는 강릉을 떠나네

기차가 플랫폼을 슬며시 빠져 나가자 이은진씨의 눈빛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청량리역까지 7시간이란 짧지 않은 여정이 앞에 놓여 있다. 객실은 그날도 휴가를 다녀오는 가족과 젊은이들로 만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정차역은 모두 18곳. 대개 20분 간격으로, 때론 5분 간격으로 안내 방송을 내보내야 한다.

승객이 안전하게 차를 타고 내리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자칫 화장실 문이 고장나거나 기차 바퀴가 하나라도 헛돌면 그야말로 초비상이 걸린다. 다행히 강릉을 빠져 나와 정동진역을 지날 무렵까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이은진씨가 겨우 숨을 돌렸다. 인터뷰를 위해 대면한 곳은 열차 방송실. 승무원들이 머무는 유일한 공간이다. 객실 사이 화장실 앞에 마련된 이 곳은 한 사람이 다리를 뻗을 만큼도 안돼 상대편 다리가 자꾸 발끝에 차인다.

"승무원 머물 곳이 여기밖에 없나요?" 그는 대답하기가 민망한지 "그렇죠 뭐…"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전날 오후 10시에 청량리를 출발해 다음날 새벽 5시에야 강릉에 도착했다고 했다. 잠시 숙사에서 잠을 청한 뒤 다시 오후부터 근무에 나설 참이었다. 다소 들뜬 화장이 그의 피곤함을 말해주는 듯했다. 왜 지금까지 여성 여객 전무가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힘들긴 하죠. 그래도 사람 냄새 나는 객차 안이 좋아요. 객지에서 잠자는 것에도 익숙해졌죠."

씩씩하기만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여객전무.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기차에서 일하길 꿈꾼 것은 아니다.

"대학 가기 전까지 기차는 딱 한 번밖에 안 타봤다"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열차는 미지의 세계였다. 철도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한 그의 고교 시절 성적은 명문대도 탐내 볼 만큼 상위권이었다. "뚜렷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학교가 필요했어요. 집안 형편이 4년제 대학을 다닐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집에서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수능 시험 후 모 대학 회계학과 원서를 들고 그 학교 교문까지 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제가 원해서 철도대를 간 건 아니었지만 기차는 분명 제 삶을 건강하게 변화시켰어요. 특히 여객 전무가 된 후로는 말수도 많이 늘고 제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대요. 왜 있잖아요. 갈수록 정들고 좋아지는 거요."

#2.거꾸로 가는 열차

열차가 태백 준령을 파고들다 갑자기 뒷걸음질친다. 도계역 다음의 나한정역 근처는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구간이다. 이곳은 경사가 급해 단번에 올라갈 수 없다. 기차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산을 오른다. 이 구역에 접어들자 그는 재빨리 열차 맨끝머리로 달려 간다. 그는 여기서 잠시 이 열차의 임시 기관사가 된다. 기차가 거꾸로 가다보니 정작 기관사는 앞길을 볼 수 없어 여객 전무가 열차의 진로를 통제해야 한다. "503호 출발 양호."

한숨을 돌리자 이번엔 승객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아니, 차가 왜 뒤로 가요." "뭐 잘 못된 것 아니에요." "비가 많이 와서 그래요?" 살며시 미소띠며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승객들은 학창시절 지리 시간에 나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 여기가 거기구나"라며 마음을 놓는다.

#3.기차는 종착역으로…

태백역을 지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사북역에 이르자 차창 밖으로 어스름이 내린다. 울창한 숲 속을 달리는 기차 옆으로 석탄 공장의 검은 기둥이 스쳐 지나가고 산등성이엔 하얀 안개가 피어오른다.

"저기 멋있지 않아요? 전 여기 지날 때가 제일 좋아요. 이제 화려해져버린 정동진보다는 밖을 보며 잠시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이 길에 정이 들었어요."

여객 전무로 기차를 탄 지 이제 두 달이 채 안됐다. 하지만 기차에서의 일상은 그의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승객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잊지 않는 미소, "다음 정착역은 양평입니다"라고 방송할 때 목소리를 가다듬는 정성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원주를 지날 무렵 캄캄한 어둠이 바깥을 감싸자 전날의 피로가 겹쳐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크게 한다.

"첫 여객 전무란 타이틀이 참 무겁게 다가왔어요. 하지만 멋있게 감내해내야 할 자리라고 생각을 바꿨지요. 전 앞으로 기차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그는 올해 방송통신대에 편입할 작정이다. 좀 더 폭넓은 지식을 쌓아 철도 행정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열차가 종착지인 청량리에 다가가자 그의 눈빛은 처음처럼 다시 살아났다. 승객들은 부산히 움직이며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휴우, 오늘 일 다 마쳤네요. 이제 빨리 집에 가야겠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여객 전무의 얼굴이 텅빈 열차 속에서야 비로소 발랄한 20대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영동·태백선=글·사진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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