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일방적 e-메일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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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특정 회사에 일방적으로 e-메일을 보낼 경우 '무단침입'인가, '표현의 자유'인가를 놓고 미국에서 송사(訟事)가 벌어지고 있다.

재판 결과에 따라서는 사전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보낸 e-메일은 물론 표현의 자유만 믿고 무차별적으로 전송한 인터넷 메일광고(스팸메일)까지 처벌받을 수 있는 중요한 법적 판단이 마련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14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송사는 세계 최대 반도체 메이커인 인텔사와 이 회사가 7년 전 해직시킨 엔지니어 출신 켄 하미디(55)간에 벌어졌다. 인텔은 하미디가 자사를 비판하는 비방 메일을 회사 홈페이지에 계속 올리자 그를 '회사재산 무단침입 혐의'로 최근 고소했다.

"사이버 공간도 명백한 사유재산이며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인텔 측의 주장이다.

'재산 무단침입'은 지금은 거의 적용된 적이 없는 법 조문이다. 인텔은 하미디를 고소할 법 조항을 검토하다가 '사이버 공간'도 재산권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사실 하미디는 캘리포니아주 폴섬의 인텔 사옥 앞에서 말을 탄 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비방 전단을 나눠준 적은 있지만 회사 건물 안으로 무단침입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하미디는 "e-메일은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하미디는 "e-메일은 과거 할 말이 있어도 방법을 찾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존재"라고 전제한 뒤 "이를 제한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며, 이는 명백한 위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에 상대방이 원치 않는 e-메일을 띄웠다고 해서 이를 '무단침입'으로 단죄하면 무수한 범법자가 양산된다는 주장도 내세웠다.

반면 미국 스팸방지재단 측은 "이번 소송은 해고자와의 분쟁이라는 차원을 넘는 것으로,재판 결과 인텔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마땅한 규제수단이 없어 방치돼온 메일 광고를 규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포르노나 사기광고 등을 보내지 않는 한 인터넷 메일을 보내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법적 규제를 하지 않아 왔다.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이달 말에 하미디의 e-메일이 '재산에 대한 무단침입'인지,아니면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인지에 대해 판단을 내릴 예정이다.

한편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최근 미국 최대 팩스광고회사인 팩스닷컴사가 수신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보낸 광고팩스 4백89건에 대해 벌금 최고액인 5백40만달러를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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