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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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연극 제목 한번 참 특이하다.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느니,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등 긴 제목의 작품들은 대개 밋밋했던 게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칙이었다. 근데 이 연극 세다. 코믹한데 섬뜩하고, 소소한 듯 하더니 뒤통수를 후려친다. 제목만 보고 요리에 관한 연극이나, 가족끼리 오손도손 사는 얘기를 다룰 것으로 짐작한다면 제대로 낚인 거다. 가족 등장하지 않고, 요리 만들지 않는다. 물론 밥상을 차리긴 한다. 하지만 그 식탁에 앉기란, 솔직히 겁난다.

연극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지난해 초연됐다. 최용훈씨의 깔끔한 연출에 임형택(왼쪽)·김문식씨의 안정된 연기력이 더해져 장기 공연의 발판이 마련됐다. [극단 작은신화 제공]

두 남자가 나온다. 한명은 외판원이다. 입심좋고 넉살좋은 이 중년의 남성은 철지난 백과사전 전집을 팔기 위해 분투중이다. 그 와중에 먹잇감이 하나 걸려 든다. 집에서 좀체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젊은 만화가다. 외판원은 화장실이 급하다며 애걸복걸, 집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이 다음부턴 일사천리다. “제 딸이 만화가님, 엄청 팬입니다요”라며 한껏 띄워주며 조금 덜 떨어져 보이는 만화가를 쥐고 흔든다. 거침없는 화술에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 자 여기까지가 1부다. 만화가가 혼자 밥먹기 심심해서 그러니 점심이나 같이 들자고 하는 게 2부의 시작이다. 근데 어째 분위기가 요상해진다. 급반전에 소름이 확 끼쳐 온다.

어떤 작품이든지 반전은 있을 수 있다. ‘가정식 백반…’의 백미는 1부에서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들이 2부에선 예리한 부메랑이 된다는 점이다. 작품은 곳곳에 숨어 있던 실마리들이 알고 보니 시치미를 뗀 복선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출 때와 같은 짜릿함을, 대신 서늘하고 오싹하게 선사한다. 또한 습관처럼 던지는 선의의 거짓말이, 어설픈 동정심이 때론 심각한 비극의 단초가 될 수 있는지도 섬찟하게 경고한다. 일상과 스릴러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탁월한 이야기 솜씨를 보여준 이는 아직 데뷔 5년차에 불과한 김숙종(35) 작가다. 신화·고전에만 매몰되거나 뜬구름 잡는 연극만이 넘쳐나는 요즘, 오랜만에 짜임새와 완결성을 맛볼 수 있는 연극이 나와 주었다는 점에서 더 없이 반가웠다.

▶연극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8월1일까지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 2만원. 02-889-3561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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