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책, 양 극단의 중용을 취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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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35면

최근 미국 정보당국은 10여 년간 미국인으로 행세하면서 러시아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던 러시아인 11명을 스파이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9일엔 그중 10명을 러시아가 미국 스파이 혐의로 구금 중이던 4명과 맞교환했다. 교환 장소는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빈의 공항 한 구석. 미국의 보잉 767기 한 대와 러시아제 야크 42 한 대가 거의 동시에 착륙해 스파이들만 교환하고는 곧바로 이륙했다. 냉전시대의 스파이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 언론의 태도였다. 이 사건이 터진 후 미국 신문·방송은 시종 마치 한 편의 코미디를 관람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유명 심야 토크쇼 진행자들은 물론 뉴욕타임스 같은 정론지조차 이 사건을 보고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What’s not to love)”라고 물을 정도였다. 러시아라는 독재국가가 미국의 정보를 캐내려고 고정 간첩단을 파견했는데 미 사회는 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 이유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간첩단의 허술하고 어수룩한 행태 때문이다. 간첩 혐의로 잡힌 이들은 대부분 수년간 전형적인 중산층 생활을 영위하면서 완전히 미국식 삶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정보 수집 방식으로 구글과 위키피디아를 주로 활용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전문가로부터 러시아에게: 스파이는 잊어버려라. 그 대신 신문이나 읽어라”라고 비꼴 만큼 아마추어 행태를 보였다.

또 다른 이유는 이제 미국인들이 러시아를 더 이상 ‘적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러시아가 강대국임을 자처하고 웃통을 벗은 푸틴이 ‘남성미’를 과시하더라도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없는 나라가 돼 버렸다. 이번 사건은 오히려 러시아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더욱 굳혀주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어느 칼럼니스트가 지적했듯 러시아는 절대로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소련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채 미국의 ‘대안’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냉전 시대의 수많은 소련 스파이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거부한 자들이었다. 반면 이번에 구속된 러시아 스파이들은 지극히 소부르주아적인 동기 때문에 간첩 노릇을 했다. 잡히고 나서도 ‘모국’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북한 간첩단들이 잡혔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하지만 우리 언론과 국민이 간첩단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찌 보면 미국만큼도 주목받지 못한 채 세간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간첩단 사건은 모든 신문의 ‘톱’을 연일 장식할 만큼 큰일이었음을 상기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변했을까?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이유는 북한이 더 이상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계속되는 북한의 경제위기,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북한 지도층의 때로는 황당하고 허무한 발버둥은 북한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엊그제 김태영 국방장관이 토로한 대로 ‘안 믿으려는 국민 30%’는 1차적으로 현 정부를 불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북한이 처한 상황과 갖추고 있는 실력을 봤을 때 천안함 격침과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북한이 더 이상 남한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부지불식간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6·25가 터질 때까지 남한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진 월북했다. 그후에도 월북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월북은 사라진 대신 목숨을 건 대규모 탈북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제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 이런 인식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과거처럼 대북 경계심과 적개심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북 군사 대치상황마저 종식된 것은 아니다. 북한의 천안함 격침은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일부 보수층은 과거 냉전시대의 시각에서 북한의 위협을 바라본다. 반면 일부 진보층은 북한의 위협을 애써 무시한다. 정부의 대북정책은 양 극단의 중용을 찾아야 한다. 변하고 있는 북한의 위협에 대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을 때 더 많은 국민들이 정부를 믿고 따라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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