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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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원을 뜻하는 단어에 빨치산과 게릴라가 있다. 같은 뜻이지만 어감은 다르다. 게릴라가 테러리스트란 뉘앙스가 강하다면, 빨치산은 이념적 색채가 강한 느낌이다.

흔히들 빨치산이란 말이 러시아어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비롯됐다. 라틴어 'partis(부분)'에서 유래한 말로 17세기에 지금의 유격대원이란 의미가 정착돼 독일 등 유럽에 퍼졌다(두덴 어원사전). 이 말이 러시아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경음화·구개음화해 빨치산이란 표현으로 굳었다.

빨치산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다. 1941년 독일이 침공하자 소련은 빨치산을 적극 활용했다. 개전 초기 소련 정규군은 독일군에게 밀렸지만 적 후방에 침투한 빨치산 부대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빨치산 부대 중에는 여단 규모의 대부대도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긴 채 사방의 적과 전투를 벌여야 했던 독일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대회전을 고비로 동부전선에서 퇴각하게 된다. 독일군은 패주하면서도 곳곳에서 빨치산의 공격에 시달렸다.

빨치산을 얘기하면서 유고의 티토를 빼놓을 수 없다. 티토는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독일·이탈리아에 대항하면서 안으로는 크로아티아의 친독 우스타샤 정권 등을 제압, 전후 유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아직도 유고 사람들은 베오그라드의 명문 축구팀에 '파르티잔'이란 이름을 붙일 정도로 빨치산 투쟁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한다.

우리 현대사도 빨치산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지리산·이현상·차일혁·토벌군·남부군·이태·조정래·태백산맥…. 빨치산 하면 어지러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특히 어린 시절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부친으로부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담을 누누이 들었던 기자에게 빨치산의 의미는 각별하다.

우리에게 빨치산은 이처럼 처절한 동족상잔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현대사의 기억은 우리에게 빨치산이란 말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했다. 이 때문에 빨치산은 오랜 기간 악질 빨갱이와 동의어로 통했다. 그래서 우리는 빨치산 대신 '구월산 유격대'처럼 유격대란 말을 즐겨 썼다.

빨치산 발언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아무리 막말이 난무하는 정치판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발음 실수라는 어설픈 해명에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조폭두목으로 즉각 맞받아치는 쪽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정말 난형난제(難兄難弟)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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