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8>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37.무산된 해외진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남사장님. 괌에 한 번 가보지 않겠습니까?"

1972년 3월.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대형 도매회사인 데라우치(寺內)의 전무가 괌에 여행을 가자고 했다.

"놀러 다닐 시간이 없는데요."

그는 내 말에 빙긋이 웃었다.

"투자하러 가자는 얘깁니다."

여성 속옷 사업을 하는 나에게 괌에 투자하라는 얘기는 좀 생경하게 들렸다.

"그 섬은 속옷을 거의 입지 않고 사는 데가 아닙니까."

"어디 브래지어만 사업입니까. 거기에 가면 한국 기업들이 몇몇 있습니다."

미국령인 괌에는 당시에도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었다. 현대건설은 미군 공사를 하느라 일찍부터 진출해 있었다.

"그렇다면 한번 가보십시다."

나는 그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괌 현지에서 나흘 동안 기초조사를 하고 다녔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한 결과 봉제공장을 세우면 잘 될 것 같았다. 나는 현지에 있는 외환은행 김석주(金錫周) 지점장을 찾아가 사업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봉제공장이라면 한번 해볼 만한 사업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선 세탁소도 아주 잘 되거든요."

당시 괌에서 하는 사업들은 주로 미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괌 원주민들의 임금은 매우 쌌다. 생산 단가를 줄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미국령이 아닌가. 미국 본토에 수출하는 길이 자동으로 열리는 셈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미국에 자유롭게 수출을 할 수 없었다. 쿼터제 때문이었다. 한국이 미국에 수출하는 제품은 품목에 따라 물량이 정해져 있는 게 많았다.

나는 괌에 봉제공장을 차리면 그러한 규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무관세에다 무쿼터라는 조건이 나를 유혹했다. 나는 괌 공상국(工商局)을 찾아가 투자의향을 밝혔다. 한국의 산업자원부에 해당하는 행정부처였다.

괌의 투자여건은 좋았다. 나는 본격적으로 전력과 공업용수 문제를 알아보았다. 전력을 공급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지하 우물을 파는 데는 2만달러 정도의 자금이 소요됐다. 그러나 공업용수를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시설만 갖춰놓으면 그 다음부터 큰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현지 원주민들의 임금은 시간당 1.9달러였다. 한국에 비하면 10배 정도 비싼 수준이었지만 미국 본토에 비하면 매우 싼 편이었다.

여러 조건이 맞아 공장을 짓기만 하면 잘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복병을 만났다.

"봉제공장을 세운다구요? 봉제는 폐수가 많이 발생하는 업종 아닙니까?"

공상국 관계자는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이곳에서는 폐수 처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장을 세우기 어렵습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나는 난감했다.

"폐수를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렇다. 봉제공장에서는 폐수가 많이 나온다. 제품 색깔을 맞추려면 소규모나마 염색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그 염색공장에서 나오는 폐수가 사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대두된 것이었다.

괌은 작은 섬이었고,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어 모든 일이 행정적으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는 편이었다. 특히 공해 문제는 아주 엄격하게 다뤘다.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공해 기준보다 당시 괌의 기준이 더 까다로웠던 것 같다. 괌 당국은 폐수처리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으면 공장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폐수처리 시설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따져봤다. 차라리 사업을 안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괌에 봉제공장을 지으려던 계획은 뒤로 미뤄야 되겠습니다." 나는 외환은행 지점장에게 결과를 설명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해외에 진출하고 싶었던 꿈은 일단 날개를 접었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