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하다 새해 맞은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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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쪽사진) 지난해 12월 31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아래사진) 김원기 국회의장이 같은 날 본회의 진행을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가로막고 있다. 조용철 기자

2004년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도 여야는 '4대 법안'의 처리방식에 대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극한 대치상황을 이어갔다. 열린우리당은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에 따라 이날 본회의를 열어 새해 예산안,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 과거사법 개정안, 정기간행물법(신문법) 개정안 등을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한나라당 의원들은 합의안에 반발하며 새벽부터 본회의장을 점거해 늦은 밤까지 회의가 열리지 못했다.

김원기 국회의장은 이날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국회의장으로서 여야 간에 합의된 의사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법적인 모든 수순을 밟지 않을 수 없다"며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경호권 발동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의장은 "원내대표끼리 원만히 합의하고 국회 의장이 정식 기자회견까지 해 국민에게 발표한 합의사항의 이행을 폭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며 한나라당에 유감을 표시했다.

이에 앞서 김 의장은 원내대표 회담에서 합의된 안건에 대해 해당 상임위에 이날 새벽 3시까지로 심사 기간을 지정, 직권상정을 위한 준비를 끝냈다. 김 의장은 회견을 마친 뒤 본회의장에 들어가 안건 처리를 시도했으나 농성 중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장석 접근을 봉쇄하자 일단 퇴장했다.

한나라당과 물밑 접촉을 통해 김 의장은 이날 저녁 다시 회견을 하고 "한나라당에서 합의서 불이행은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과거사법안은 2005년 2월 임시국회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며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는 충정을 헤아려 달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4대 법안 중 신문법안을 제외한 나머지 3개 법안의 처리를 뒤로 미룬다는 뜻이어서 열린우리당이 강력 반발했다. 그래서 국회는 진통을 거듭했다.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는 "예산안과 파병 연장안이 31일 밤 12시까지 통과되지 않으면 국가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연내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쟁점 법안을 다 패키지로 (처리)하기로 했던 것인데 여당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논의가 힘들다"며 여당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다.

?사상 최악의 연말 국회=한나라당 의원 40여명은 이날 새벽 1시부터 본회의장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일부 의원은 의장석 뒷자리에 누워 지친 표정으로 새우잠을 청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전 9시쯤 박 대표 주재로 최고중진 연석회의를 열어 국회 대책을 논의한 뒤 "여당이 과거사법.신문법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려 하는 한 본회의장을 사수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비슷한 시간 열린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선 전날 여당이 국가보안법 '합의안'을 깼다는 언론보도에 대해 지도부가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종걸 원내수석부대표는 "보안법과 관련해선 비공식적으로 열린우리당의 중진의원들이 한나라당과 협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표 간 합의는 전혀 아니었다"며 "이를 마치 여당이 합의안을 뒤집은 것처럼 보도한 것은 명백한 오보"라고 주장했다.

이어 오전 9시40분쯤 의원총회를 마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하나 둘씩 입장하자 본회의장엔 다소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일부 여당의원이 "거기서 뭣들 해요. 내려오세요"라고 말했을 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오전 11시쯤 열린우리당 천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입장하면서 분위기가 다시 경색됐다. 김원기 의장이 기자회견에서 경호권 발동을 시사했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기 때문이다. 의장석 주변의 한나라당 의원이 60~70여명으로 늘어났다.

오전 11시20분쯤 김원기 의장이 사회를 보러 본회의장 왼쪽 통로에 나타나자 한나라당 남경필.박창달.이방호.안경률 의원 등 10여명이 막아섰다. 의석에 앉아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일제히 전날 양당 원내대표가 서명한 합의문을 흔들어대며 "약속을 지키라"고 시위했다.

김 의장은 제지하는 야당 의원들에게 "양당 간에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국회의장으로선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번 더 협상의 기회를 주셔야 한다"며 김 의장을 만류했다. 5분여간 실랑이를 벌인 뒤 김 의장은 "잠깐 기다려 보겠지만 계속 이러면 나로선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의장실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여야 의원들 간엔 "협상하면 뭐 하나, 또 깰 텐데""첫 번째 합의는 여당이 먼저 깼다"는 등의 야유가 오갔다.

김정하.전진배.김선하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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