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 할머니-김순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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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의정부 여중생 역살사건을 접한 나는 몇년 전 겪은 정신대 할머니와의 일화가 생각났다.

"안돼. 안된다니까. 누굴 또 망신시키려고 저런 벌거벗은 것을 여기에 놓는다는 거야.저걸 여기에 놓는다면 내가 나간다." 겨우 작업을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게 웬일인가. 김순덕 할머니께서 내뱉는 고성이었다. 정신대 역사관 뜰에 '대지의 어머니'를 설치하던 날이다.

나는 열과 성의를 다해 작품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좀처럼 속내를 열지 않으셨다. 막무가내로 왜 옷을 벗겼느냐는 것이었다. 두 시간이 가까웠다. 진땀이 났다. 그렇다. 예술이라고 옷을 벗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본래 '대지의 어머니'는 대전 엑스포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피폐해 가는 농촌을 주제로 소외받은 농부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던 작품이다. 너무 큰 작품이라 나는 작업실 옆 주차장 터를 빌려 판을 벌이고 있었다.

내 작업장은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가 됐다. 그러던 중 나는 한 꼬마로부터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아저씨. 이게 할아버지예요, 할머니예요 ?" "야 임마 젖을 봐. 이게 할머니지 할아버지냐 ?"

"젖을 보면 할머닌데요. 근데 할아버지 같아요."

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할머니 누드 모델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면 안됐다. 세상에 할머니 누드 모델이라니 !

겨우 찾아낸 할머니는 옆에서 구경만 하시고, 할머니의 딸은 "망측해라, 옷을 벗는 거예요 ?" 하며 연신 벗지 않는 것이라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못믿겠다는 듯 "벗으라면 절대 그냥 돌아와야 돼요"라는 당부를 남기고 할머니를 두고 떠났다. 딸이 떠나고 나는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할머니, 벗어야 되는데요." "하므 벗제, 이까짓 썩으면 문드러질 살덩어리인데."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할머니는 벌써 자신이 할 일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내 앞에서 옷을 벗으셨다. 할머니 덕분에 나는 본래 계획했던 작품내용을 바꿔 자애롭고 의지에 찬 이 시대의 어머니-대지상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그 작품을 정신대 역사관의 요청으로 가지고 왔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발견하고 대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만물을 받아들이고 새 생명을 길러내는 대지, 대지로서의 어머니,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표현하려다 보니 옷이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가 부끄러울 것이 무엇인가.

드디어 할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도 울었다. 너무 아팠다. 정신대 할머니는 억지로 옷을 벗었다. 자발적으로 벗는 옷과 강제로 벗겨지는 옷은 얼마나 다른가. 스스로 벗은 옷은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 벗겨지는 옷은 죄악이고 범죄고 치욕이다. 하물며 죽음은 어떠한가. 아직 꽃피지도 못한 천진무구한 영혼이 죽음을 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죽인 자들은 대답이 없다.

▶약력=호암갤러리, 뉴욕 얼터너티브미술관 초대 개인전 등 12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 『누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벽없는 미술관』 등의 저서가 있고 매주 일요일 인사동에서 '당신도 예술가'를 4년째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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