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정책 개혁 부작용 외국계 회사만 득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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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태복(泰馥)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주장한 다국적 제약사 압력설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현행 약가(藥價)정책이 외국계 약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현 정부의 약가제도 개혁 실패가 약가에 대한 통제력을 급격히 떨어뜨려 약제비 상승을 불러왔고, 의약분업까지 맞물려 국민의 부담을 크게 늘린 것으로 드러났다.

<관계기사 5면>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실거래가 상환(償還)제로 대표되는 약가제도 전반을 재검토해 뼈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의 약가를 통제할 수 있는 의약품가격 재평가제도와 참조가격제 등의 장치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국민의 정부는 1999년 11월 20년 이상 유지돼온 약가제도를 바꿨다. 정부에서 약값을 정해 발표하던 고시가를 실거래가 상환제로 바꿨다. 약을 둘러싼 과도한 마진을 인정하지 않고 실제 거래한 가격대로 약값을 쳐주는 제도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갖가지 부작용이 속출했다. 의료기관들이 약을 싸게 구매할 동기가 사라졌다. 의약분업 시행으로 약품 마진이 없어진 의사들은 약효를 내세워 비싼 외국계 약 처방을 늘렸다. 그러다 보니 약제비가 98년 2조8천여억원에서 지난해는 4조1천여억원으로 43%나 뛰어 건보재정을 압박했다. 그만큼 국민 부담이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많이 팔린 상위 10개 의약품 중 8개가 외국계 제약사 제품이었다.

또 현행 약가제도로는 외국계 약의 가격조정에도 한계가 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7천6백여개의 약값을 2~9% 내렸다. 건강보험 가격보다 낮게 거래한 약들을 적발해 값을 깎은 것이다. 하지만 인하된 약의 90% 이상이 국산약이었다. 외국계 약들은 수요가 많은 탓에 덤핑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을 둘러싼 검은 거래도 여전하다. 한 다국적 제약사는 지난 2년간 의사들에게 술값과 골프비 명목으로 5백47차례에 걸쳐 2억4천만원을 지출한 것이 적발되기도 했다.

병원경영연구원 변재환 박사는 "정부의 무리한 개혁 드라이브로 인해 약가제도가 개악(改惡)되고 다국적 제약사나 대형 제약사만 득을 봤다"면서 "현 제도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포함해 약가제도 전반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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