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뢰경보 울려도 "알아서 피하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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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최근 경기도 파주 서원밸리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전 라운드 도중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렸다.

8번홀에 이르렀을 때 근거리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이때 사이렌이 맹렬히 울렸다. 라운드를 즉시 중단하고 클럽하우스로 철수했다.

골프장측은 "자동감지기를 설치해 낙뢰가 골프장 근처에 떨어지면 경보가 울린다"고 자랑했다. 우리 일행은 '골프장이 내장객을 위해 이런 첨단 서비스까지 하는구나'하고 흐뭇해 했다.

모처럼 필드에 나와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 20분 가량 머뭇거리는 동안 비가 긋는 것 같았다. 다행히 라운드를 계속할 수 있었다.

몇홀을 더 돌았을 때 또한번 사이렌이 울렸다. 마침 그늘집 앞 그린에 있을 때여서 이번에는 "대피도 할 겸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지만 도우미와 경기진행 요원은 "무슨 얘기냐. 라운드를 계속하든가, 아니면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골프대회를 취재할 때 사이렌이 울리면 무조건 경기를 중단하고 철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사이렌은 왜 울리느냐"고 물었다. 경기진행 요원은 "사이렌이 울리는 건 낙뢰가 떨어지니 잘 피해서 공을 치라는 말"이라고 답했다. 골프장에 대해 좋았던 이미지가 단숨에 바뀌는 순간이었다. 여름철에는 소나기를 동반한 낙뢰가 잦지만 모처럼 한번 라운드 기회를 갖는 국내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라운드를 강행하는 골퍼가 많다.

사람이 낙뢰사고를 당할 확률은 1백만분의 1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사고를 안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2년 전 무주의 한 골프장에서는 내장객이 낙뢰로 숨지는 일이 있었고, 손해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소송도 빚어졌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골프장 낙뢰사고가 발생할 경우 골프장이 사고방지를 위해 안전배려 의무, 공작물의 설치 보존상 방호설치 의무를 다하였느냐의 여부에 따라 배상책임이 있다고 한다.

골프장측은 혹시 사고의 경우에 대비, 안전배려 의무를 다했다고 말하기 위해 사이렌을 울리는 것일까.

성백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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