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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 꿈꾸는 열린 음악이 좋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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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지난해 말 클래식의 깔끔한 향취와 뉴에이지의 편안한 감성이 어우러진 앨범 '퍼스트 러브'를 국내에 발표하면서 단숨에 음악 팬들을 사로잡았던 영국 거주 피아니스트 이루마(24). 최근 이창동 감독·설경구 주연의 영화 '오아시스'의 개봉을 앞두고 이미지 앨범을 낸 그에게 '스타 플러스'를 통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별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김광민 교수님(MBC-TV '수요 예술무대'진행자)이나 병우 형(기타리스트)요." 마침 이병우(37)가 음악을 담당했던 '마리 이야기'가 지난달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아 근황이 궁금하던 차였다.

비가 올까 말까 망설이는 듯 푹푹 찌던 지난 주말, 서울 포이동에 있는 이병우의 작업실 '음악이 있는 마을'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우선 두 사람의 인연이 궁금했다. 처음 만난 건 지난 5월 KBS-TV의 음악프로인 '클래식 오디세이'에 출연했을 때라고 했다. 이루마는 그 자리에서 '오아시스'이미지 앨범에 세션맨으로 참여해 달라고 졸랐고, 당시 사정상 함께 할 수 없었던 이병우가 트럼펫을 부는 이주한씨를 대신 소개하면서 가까워졌다고 했다.

이루마는 열한살 때 온 가족이 영국으로 이민을 가 음악 영재학교인 퍼셀음악학교와 런던대를 나온 해외파다. 그런데도 1980년대 중반 이병우가 조동진과 함께 결성한 그룹 '어떤 날'을 잘 알고 있었다. 둘째 누나(이루마의 두 누나는 모두 순 한글 이름으로 루다·루리라고 했다)덕분이었다. 그가 "루리 누나가 '어떤 날'을 무척 좋아해 런던에서 테이프로 귀가 닳도록 들었다"고 말하자 이병우의 입가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미소가 돌았다.

'어떤 날'해체 후 솔로로 활동하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원과 미국 피바디 음대 등을 거치며 클래식의 세례를 받은 이병우, 그리고 다섯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첼로·오보에까지 손을 대다 뉴에이지로 길을 튼 이루마. 자신들의 음악세계의 밑거름이 됐던 클래식과 대중음악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두 사람은 특히 10년 넘게 객지 생활을 하며 정신적·음악적 방랑을 했기 때문인지 음악에 대한 시각도 열려 있는 듯했다.

이병우=제가 클래식 기타로 유학을 하고 왔다니까 좀더 고급스럽게, 색다르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는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클래식에는 수백년의 노하우가 쌓여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간단한 구조에 개성을 중시하는 대중음악을 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되겠죠.

이루마=클래식은 이해가 많이 필요하고 해석을 붙여야 하니까 비대중적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곡을 만들거나 연주할 때는 달라요. 어떤 음을 하나 쓰는데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건 차이가 나니까요. 곡에 품위를 곁들여 준다고나 할까요."

이병우=제가 유학을 결심한 건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이 실력차가 많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어요. 11년간 외국을 떠돌다 보니 외국 문화에 대한 콤플렉스도 자연히 사라지더라구요. 또 '우리 것'을 확립해야 한다는 단일 민족적인 집착보다는 각국의 음악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아 섞였을까에 관심이 갔어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요.

이루마=현대음악을 전공했지만 어딘지 어렵고 고지식하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편안하고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하고 싶어 종목을 바꿨어요. 저처럼 어렸을 적부터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히 한국적 정서가 뭘까 고민하게 되지만, 전 정답은 없다고 봐요. 다만 제 뿌리가 동양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곡을 듣는 친구들은 '네 음악은 동양적'이라고 평을 하거든요.

이병우=그래요. 나 자신의 고유한 정서는 어딜 가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에 대한 내 몸의 화학 반응은 동일하니까요. 그런 데서 뭔가 다른 걸 시도하는 것이 중요한데…. 음악인들은 본능적으로 늘 새로운 걸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니까요."

이들과 영화음악의 인연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유학 생활 도중 짬짬이 '그들만의 세상''세 친구'등의 음악을 만들었던 이병우는 앞으로 김지운 감독의 '쓰리(three)'와 최지우·안성기 주연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음악작업을 할 예정이다. "영화음악은 감독이나 시나리오의 의중과 가장 가깝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음악'이라고 못박긴 힘들지만 그래도 음악적 영역을 넓히는 데는 필요하다"는 그는 '마리 이야기'같은 팬터지뿐 아니라 액션·코미디 영화도 가리지 않을 참이다.

이루마는 다시 영국에 돌아가 대학원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할 계획이다. "이미지 앨범은 작곡가가 관객의 입장이 돼 작품을 본 감상을 담아내는 작업이라 OST와 또다른 맛이 있다"는 그는 "'오아시스'에선 뇌성마비 여인과 전과자 사내의 천진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박하사탕'으로 이창동 감독의 팬이 됐다는 그는 '거짓말하지 말자'는 이감독의 신념을 존경한다고 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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