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海교전 5失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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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가 늘 그래왔듯이 서해교전도 요란한 시비와 논쟁만 하다가 종합적 결론이나 시정책 없이 시간과 함께 그냥 흘려보낼 것 같다. 개도 한번 맞은 구멍으로는 다니지 않는다는데 우리는 이번 일을 겪고도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듯 다시 그전처럼 북한을 대해야 할까.

서해교전으로 우리는 고속정 한 척과 20여명의 인명피해만 당한 게 아니다. 그 사태 직후부터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서로 치고받는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빠져들었다. 당장 여야간의 싸움이 격화되고 햇볕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더 치열해졌다. 북한도발이 의도적이냐 우발적이냐를 놓고 편이 갈리고, 금강산관광의 계속 여부를 놓고도 우리끼리 핏대를 세웠다. 어민 월선론(越線論)과 월선 부인론이 맞서고, 확전(擴戰)예방 천만다행론이 나오는가 하면 확전기우론·패배핑계론도 나왔다. 언론사까지도 서로 치고받고, 심지어 일부 어민끼리도 감정이 상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미간에도 틈새가 벌어졌다. 우리 정부는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특사를 북한에 보내라고 간절히 요청했지만 미국은 무정하게도 특사 방북을 취소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에게 군사적 패배뿐 아니라 우리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효과까지 거뒀으니 북한이 속으로 웃고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됐을까. 평소 분열이 있더라도 밖에서 긴급사태가 생기면 하던 논쟁도 중단하고 단합부터 해야 할텐데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은 결국 정부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사태 초기부터 국민단합은커녕 국론을 분열시키기 딱좋은 태도를 보였다. 군이 의도성 있는 도발이라고 발표했는데도 정부는 대외적으로 '우발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북한에 대해 사과·책임자처벌 등 강경요구를 하면서도 햇볕정책은 불변이라고 했다. 강경한 말을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최고통수권자가 희생자조문도 하지 않았고, 영결식에 고위층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정부가 이런 이중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데 국론이 분열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①사람 잃고 배 잃고 ②내부분열과 갈등이 촉발되고 ③미국과의 틈새가 벌어지고 ④북한에 우리의 허점을 다수 노출시키고 ⑤정부신뢰가 추락하는 등 대체로 다섯가지 정도를 잃은 게 확실하다.

이렇듯 참담한 결과가 나온 근본원인은 당연히 햇볕정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북한을 포용·지원해서 남북간 평화·신뢰를 구축해 나가자는 햇볕정책은 분명 좋은 정책이다.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일은 햇볕정책도 '대한민국의 정책'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정책인 이상 대한민국의 국익에 봉사해야 하고 국익에 어긋날 때는 햇볕정책도 후퇴·수정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햇볕정책에 봉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DJ정부에서는 더러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데 문제가 있다. DJ정부에서는 햇볕정책 자체가 '신주(神主)'처럼 돼버려 햇볕정책이 상처받을까, 비판받을까 두려워하고 쉬쉬하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국익·국격(國格)·자존심이 손상당하는 일이 여러차례 있었다. 햇볕손상=DJ손상 비슷한 설정 때문에 정책의 현실적합성·탄력성·효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번에도 보면 북한에 사과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도 금강산사업 유지를 결정했다. 무력보복을 하지 않는 한 우리의 대북카드는 경제·외교적 방법 뿐인데 요구조건을 내걸면서 요구를 밀어붙일 수단은 미리 포기했으니 무슨 수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받아낼까. 아마 북한은 우리가 보복도 못하고 중단시킨 30만t 쌀지원도 머잖아 보내줄 것으로 믿고 있을 것이다. 선제공격을 해도 뒷걱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터에 재발방지가 잘 보장될까.

서해교전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재발방지를 북한에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우리 자신에게 더 철저히 해야 한다. 다시는 우리 장병과 군함이 무참히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모든 정책과 방안을 강구하고 우리 자신이 맹세해야 한다. 더이상 당하고도 대책 없는 햇볕정책이 아니라 북한이 우리와 잘 지내면 반드시 득을 보고, 우리를 건드리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줘야 한다. 5실론(五失論)따위가 또 나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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