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5>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 :24. 골프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주말을 맞아 골프 얘기로 머리를 식히고 넘어갈까 한다. 나는 요즘에도 한 주에 두 번은 골프를 친다. 한 해에 1백일 정도 필드에 나가는 셈이다. 80세를 바라보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골프의 덕이 크다고 생각한다.

무역상으로 출발한 나는 골프를 일찍 배웠다. 1954년 무역회사(남일물산) 임원으로 홍콩에서 1년 동안 체류할 때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골프 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골프를 치더라도 수준은 대부분 걸음마 단계였다.

나는 홍콩에서 무역회사로 성공해 이름을 날리고 있던 태한무역공사 이규일(揆一·작고)사장의 권유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사장은 클로스터 호텔 골프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벤 호건' 골프채와 골프화·골프웨어 등을 갖추도록 했다.

나는 평일에도 오전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사장을 따라 홍콩 뒤쪽 친수이완(深水灣) 9홀에 가서 골프 연습과 라운딩을 했다. 골프채가 손에 익을 무렵엔 72홀인 로열골프클럽에 나가기도 했다.입회비는 2백달러였다.

나의 골프 인생은 이처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작됐다. 이듬해 귀국한 나는 홍콩에서 골프를 배운 덕에 서울컨트리클럽에 가입,주 2회 이상 골프를 쳤다.

당시에는 대통령배 골프대회가 있었다. 우승은 늘 미국 사람들 차지였다.

"매번 미국인들에게 질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자존심이 상한 서울컨트리클럽 이순용(淳鎔)이사장은 5명의 대표선수를 육성했다. 나도 포함됐다. 우리는 특별훈련을 했다. 매일 오후 2시면 어김없이 골프장에 모였다. 한여름에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황달병에 걸리기까지 했다. 2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나는 병상에 누워 반성을 했다.

"회사 일을 너무 팽개쳤구나."

나는 당시 무역회사(남영산업)에서 페니실린을 수입하고 있었다. 만능의 항생치료제로 통하던 페니실린은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골프에 미쳐 페니실린이 창고에서 썩는 줄도 몰랐다. 유효기간이 지난 물량을 몽땅 폐기처분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회사부터 살리고 봐야지."

퇴원 후 1년 동안 나는 골프를 치지 않았다.

69년 나는 서울컨트리클럽 운영위원장을 맡았다.나는 골프장 식당 운영에 공을 들였다. 냉면으로 유명한 을지로 서래옥에 식당 직원을 보내 냉면 국물을 사오기도 했다.

클럽 이사장은 자유당 당무위원인 김성곤 의원이 맡고 있었다. 거물급이 버티고 있어 든든하기도 했지만 식당 외상값이 골칫거리였다. 골프장을 찾은 국회의원들이 식사비를 이사장 앞으로 달아놓곤 했기 때문이다. 액수가 불어나면서 내 고민도 커졌다. 나는 이사장에게 보고했다.

"식당에 외상값이 많이 쌓였습니다. 의원님들이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김성곤 이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갚아주지요."

거물급 정치인답게 그는 3백만원을 흔쾌히 갚아줬다. 당시 대졸 초임이 월 3만원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골프를 치러왔다. 이때 수행원과 경호원들의 식사비도 金이사장이 사비로 부담했다.

서울컨트리클럽은 내가 입회할 55년 당시 군자리(君子里)에 있었다. 지금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자리다. 29년 조선 왕실이 지은 것을 해방 후 정부가 소유하고 있다가 서울컨트리클럽 회원들에게 정식으로 불하한 것이다.

그러다가 73년 박대통령이 그곳에 어린이대공원을 지으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이전할 후보지로는 관악골프장과 한양골프장이 물망에 올랐다.

하루는 서울컨트리클럽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박종규(朴鐘圭·작고)실장이 나를 불렀다.

"한양골프장 사장을 만나보게."

나는 조봉구(趙奉九)사장을 만났다.

"유리공장에 30억원을 투자했는데 자금이 달립니다. 골프장을 처분해야 하니 도와주시오."

조사장의 청에 따라 서울컨트리클럽은 한양골프장을 인수해 원당으로 이전했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