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영화 전용관의 우울한 초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최근 칸 국제영화제 취재를 갔을 때 백두대간 대표인 이광모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인 광화문 씨네큐브가 올 들어 부쩍 어려워졌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상황을 물었다. 이감독은 "한 편을 개봉할 때마다 적자가 8천만원 가량 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는 인건비 등 경상비를 포함한 액수다.

도대체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버티느냐고 우문을 던졌다. "그나마 손님이 좀 들었던 지난해의 '타인의 취향'과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덕분에 근근이 살고 있지요. 올해도 하나 터져주면 훨씬 수월할텐데…." 올해 씨네큐브의 성적은 참담할 정도다.'꿈속의 여인'이 1만5천명,'써클'은 3천명,'줄리엣을 위하여'는 2주 동안 7백명이 들었다. 백두대간에 따르면 이는 손익분기점의 50%에도 못 미치는 관객 수다.

서울에 돌아오니 한 영화계 인사가 "이광모 감독이 '창고에 쌓여 있는 예술 영화 필름을 꺼내서 불태워버리고 싶다'고 그러더라"는 충격적인 말을 전해왔다. 물론 정말 불태워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마음이 짠했다. 이달 예정됐던 '아귀레, 신의 분노'도 개봉이 미뤄졌다고 한다. 한 달에 한 편씩 개봉하겠다는 이감독의 뚝심이 오래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처럼 한국에서 예술영화가 갈 길은 아직 멀다. 1990년대 중반 예술영화 전용관이 북적거린 때가 아주 잠깐 있었지만 지속적인 관객층 확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이감독의 운영 스타일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아직 명쾌한 해답은 누구도 내놓지 못한다.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백두대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다. 물론 '예술영화=선(善)'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 설혹 재미가 좀 없더라도 참고 봐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예술영화가 유인해야 할 관객은 블록버스터를 보러 가는 관객과 대체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種)다양성이 줄 수 있는 풍요로움을 한국 관객이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자꾸 든다. 주요 극장가를 액션 코미디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도배하는 게 자본의 논리 때문이라고 쳐도 어딘가에는 영화팬의 숨통을 틔워줄 '해방구'가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평생 볼 수 있는 영화가 미국영화와 한국영화 딱 두 종류인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