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中감정 커지자 협상 서둘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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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중 양국이 23일 탈북자의 신병처리와 중국의 주권침해 문제를 일괄타결한 것은 수교 10년을 맞은 양국 관계의 성숙도를 방증한다는 지적들이다.

양국은 주권침해 문제에서 서로 유감을 표명해 자칫 풀기 어려운 문제를 적절히 타협하는 정치력을 발휘했고 탈북자 문제에선 실리를 나눠 가졌다.

협상 과정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달 23일 탈북자 崔모(40)씨가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중국 측은 한국행에 긍정적이었다. 제3국 공관 진입 탈북자와 같은 신병처리가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그러나 탈북자의 우리 공관 진입이 이어지면서 초강수를 던졌다. 탈북자의 신병인도와 탈북자 수용 거부를 우리 측에 요구했다. 우리 공관이 탈북자의 한국행 정거장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양국간 협상은 지난 13일 중국 측의 우리 공관 침입과 한국 외교관 폭행 문제로 더 꼬였다. 중국 측이 "공관 침입은 사실과 다르고, 외교관 폭행 문제는 한국 측의 공무집행 방해로 생긴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이 문제는 양국간 외교마찰로 비화됐다.

중국이 강경 입장을 누그러뜨린 것은 한국의 대중(對中)비난 여론이 거세진 시점부터였다. 리빈(濱)주한 중국대사의 언론을 통한 해명이 되레 반중(反中)감정을 불러일으키자 중국은 탈북자 문제와 주권침해 문제의 일괄타결을 모색했다고 한다.

협상은 여러 채널로 이뤄졌다. 김하중(金夏中)중국대사와 왕이(王毅)외교부 부부장, 양국 실무진간 연쇄협상이 이뤄졌고, 19일 태국에서의 한·중 외무장관 회담에서 타결의 물줄기를 잡았다.

회담 당시 최성홍(崔成泓)외교통상부장관이 탕자쉬안(唐家璇)중국 외교부장에게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자 唐부장은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화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합의문 작성은 진통을 겪었다. 중국은 주권 침해문제에 대해선 서로 유감을 표명하자고 했고,'우리 공관이 탈북자의 통로가 돼서는 안된다'는 요구사항과 관련해선 우리 측이 '이해와 공감'으로 하자고 한 데 대해 '합의'라는 표현을 내세웠다. 중국 측은 강제연행해간 元모(53)씨의 신병인도에도 난색을 표시했다.

그래서 23일 오전까지만 해도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본 실무자는 없었다. 중국이 돌아선 것은 이날 정오쯤. 주중 대사관측에 실제 합의문과 거의 같은 한국 측 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중국 측의 입장 선회는 대만문제와 미·중 문제 등 굵직한 외교현안을 챙기고 있는 첸치천(錢其琛)부총리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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