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나를 용서하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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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나에게 무어라고 선고하든

역사는 나를 용서할 것이다.

Sentence me; no matter

History will absolve me.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을 게다. 어느 외지에 실린 이 말을 처음 보고 꽤나 흥분했던 것이. 독재자의 법정이 어떤 벌을 내리든 역사 앞에 무죄라는 그 '건방진' 레토릭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반란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26살의 청년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의 최후 진술임을 알았다. 이 한마디에 무조건 반한 나는 그때부터 그의 얘기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쿠바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접하게 만든 카스트로는 내게 일종의 최면이었다.

카스트로가 거는 최면에

서점 진열대를 무심히 돌아보던 중 로버트 쿼크의 『피델 카스트로』(홍익·2002)가 대번에 눈에 띄었다. 월드컵 열기에 들뜨면서도 7백여쪽의 이 책을 후딱 읽어버린 것은 이런 소싯적 추억 때문일지 모르겠다. 축구 경기장의 영웅에 세계의 시청자가 환호할수록 내게는 카스트로의 '극성'이 떠올랐다. 야구광인 그는 미국과 시합이라도 열리는 날에는 구장 본루 뒤까지 나와 자국 팀에게 "야구라는 이름의 전쟁에서 미국에 지는 것은 수치며 심지어 반역이라고까지"(2백49쪽) 으르렁댄다니 말이다. 북한과의 연대를 내세워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쿠바 대표단을 보내지 않은 그는 내심 크게 섭섭해 하는 쿠바 국민에게 "우리는 우리의 원칙을 금메달과 바꾸지 않는다"(7백21쪽)고 엉뚱한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 이래 영웅의 조건에는 비극성이 가미되었다. 진정한 영웅의 길은 영광의 박수 아닌 운명과의 대결에 있고, 그래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승리 대신 장렬한 패배일지라도 크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 영웅의 대열에 나는 카스트로를 천거한다. 영웅의 비극은 때때로 낭만적 모험으로 치장되는데, 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쿠데타로 헌정을 전복한 바티스타 대통령에게 1백8년의 징역을 선고하라고 소송을 제기하고, 1백67명의 철부지 '혁명가'들과 쿠바 제2의 병영을 습격한 것은 그 낭만성의 극치를 이룬다. 망명지 멕시코에서 모집한 82명의 반란군을 데리고 쿠바 침투를 감행할 때만 해도 그들에게 쿠바의 장래를 걸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에 거점(foco)을 설치하고 농촌 게릴라 투쟁을 전개한 지 3년 만에 그들은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혁명 정부를 수립한다. 59년 1월 1일 새벽이었다.

카스트로는 예수회 학교에서 개인의 존엄과 정의감을 배웠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레닌보다 더 존경했다. 사회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관심에 없던 그를 반미주의로 몰아간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 정부였다. 일례로 "정권 연장을 위해서는 미국의 절대 협력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당만 열심히 때려잡으면 되는"(1백13쪽) 바티스타 같은 반공 정권을 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케네디 정부의 쿠바 침공은 피그즈만을 선혈로 물들였으며, 쿠바 내의 미사일 기지 건설 분쟁에서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걸고 힘 겨루기 게임을 즐겼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혁명 운동 또한 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의 어느 정부에 잘 보이려는 이유에서 우리가 반공주의자라고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2백43쪽)는 카스트로의 주장은 백번 옳지만, 문제는 현실이 그 논리를 받아들일 만큼 옳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는 소련도 신뢰하지 않았다. 쿠바의 안보를 볼모로 미국과 협상하려는 소련에 그는 "쿠바의 방어를 위해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쿠바의 국민들이다. 쿠바는 세계라는 체스판에서 졸이 아니다"(4백7쪽)라고 외쳤다. 혁명 수출을 묻는 기자에게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는가 본데 우리는 설탕·니켈·담배·과일·생선을 수출한다오. 그게 다요. 도대체 혁명을 포장해서 수출할 나라가 어디 있겠소? 그런 짓은 무기·폭탄·군대·용병들을 한짐씩 실어 나르는 제국주의자들이나 하는 짓이오." (6백39쪽)

혁명 최대의 적은 혁명주의

"혁명이 맞을 수 있는 최악의 적은 혁명주의자들 그 자신"(2백17쪽)이라고 카스트로는 혁명의 함정을 바로 보았다. 집권 40여년을 넘기며 카스트로 자신이 그 혁명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미국의 경제 봉쇄와 러시아의 외면으로 "카스트로 밑에서의 기아보다는 바티스타 아래서의 착취를" 따위의 대자보가 나붙고, 19세기 쿠바의 독립 투사 펠릭스 바렐라 신부를 기념하는 '바렐라 프로젝트' 이름으로 반체제 세력 1만인은 정치 개혁을 위한 국민투표를 청원했다. 이런 시련 앞에 카스트로는 부쩍 "자주 앉았고 덜 걸었다"(7백21쪽). 최근에는 미국으로 망명한 그의 딸 엘리나 페르난데스마저 "나는 그의 딸이기 이전에 쿠바인이고, 일반 쿠바인처럼 독재자에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아버지를 궁지로 몰았다. 어허, 우째 이런 일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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