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흔든 붉은 함성… 밤이 짧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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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와, 이겼다" "대~한민국".

함성과 붉은 물결이 세계인의 가슴 속에 뚜렷이 새겨진 날이었다.

숨막히는 1백20분간의 접전 끝에 '8강 신화'를 일궈낸 태극전사들의 투혼과 함께 4백만 거리응원 인파가 연출해낸 18일 밤의 장관은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무더위 속에 아침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 가정과 업소에서 목이 터져라 승리를 외친 국민들의 심장은 안정환 선수의 결승 헤딩골과 함께 격정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전국은 밤새 감격의 환호에 묻힌 거대한 축제장이 됐다.

◇"위대한 코리아의 저력"=안정환의 헤딩골이 터지면서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전국 거리응원장을 메운 4백20여만명의 국민은 일제히 "와, 이겼다"를 외치며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대학로에서 응원을 한 이지영(19·경기도 용인)양은 "전광판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용인에서 오전 7시에 출발했다"며 "이런 감동을 준 우리 선수들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목이 메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곧장 광화문으로 달려왔다는 정명원(18·신일고)군은 "밤새 뛰어다니며 많은 사람과 함께 기쁨을 만끽하다 곧바로 학교로 등교하겠다"고 했다.

'사랑해요, 히딩크'라는 구호가 적힌 두건을 두른 장석민(34·회사원·경기도 고양시)씨는 "우리 국민의 승리"라며 주변 사람들과 스크럼을 짜고 행진을 했다.

이날 전국 3백61곳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앞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관중 4백20만명(경찰 추산)이 모였다.서울에만 시청 앞(55만명)과 광화문(55만명) 등 1백77만명이 운집했다.

시청 부근 롯데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스페인 사업가 호세 페르난데스(46)는 "시청 앞 인파의 열기와 질서는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incredible) 광경"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열기가 선수들에게 힘을 줬을 것"이라며 "스페인과 훌륭한 승부를 하자"고 말했다.

아일랜드인 이언 오코널은 "선수들과 한마음이 된 관중의 모습은 뭉클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인 한국이 축구강국 이탈리아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한국의 저력은 위대하다"고 했다.

◇곳곳 실신사태도=설기현 선수가 극적인 동점골을 넣는 순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응원하던 여성 한명이 실신해 구급차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또 대전시 갑천변에서 이탈리아전을 응원하던 손호경(18·충남여고 2)양이 연장 후반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성공시키자 환호성을 지르다 실신,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다.

한편 이날 오후 10시45분쯤 부산시 영도구 봉래동 정모(28)씨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한국-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 경기를 보던 중 한국팀이 동점골을 넣는 순간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정씨가 한국팀이 0-1로 뒤지다 동점이 되는 순간 흥분해 가슴을 잡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다.

◇밤샘 축제=감격스런 승리는 여기저기서 "가자, 4강으로"를 외치는 군중들의 거리축제로 이어졌다. 서울시청 앞과 광화문·신촌·대학로, 부산 해운대, 경기가 열린 대전 등지에선 얼싸안은 인파들의 노래와 구호가 자동차 경적과 어울려 이내 환호의 바다가 됐고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다.

한국팀이 16강에 오른 지 나흘 만에 다시 8강 관문을 뚫자 전광판 앞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술집에서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어깨를 엮은 채 승리의 행진을 했다.

자정이 넘도록 시민들은 귀가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 "4강 한국" 등을 외치며 거리를 돌아다녔고 술집들은 승리를 축하하는 시민들로 넘쳤다. 서울시는 이날 지하철이 개통된 후 최초로 1~8호선의 운행을 오전 3시30분까지 연장했다.

강주안·성호준·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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