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잊은 주부들엔 충격이었죠" - '위기의 남자' 신성우 & 젊은 주부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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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80년대 사춘기 소녀들을 사로잡은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 꿋꿋하게 살아가는 캔디의 삶 못지 않게 앤서니·알버트·테리우스 등 남자들과의 로맨스에 더욱 가슴 졸였다. 캔디의 남자들 중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테리. 긴다리, 어깨에 닿는 곱슬한 머리, 우수의 눈빛은 모든 소녀들의 연인이기에 충분했다.

해묵은 기억 속의 테리우스가 돌아와 이제는 아줌마가 된 당시 소녀팬들의 마음을 흔들어놨다. 이달초 종영한 MBC '위기의 남자'의 주인공 신성우(34)가 바로 그다. 고난을 겪던 캔디에게 테리우스가 짠하고 나타났듯 '위기의 여자' 금희를 감싸주기 위해 그가 나타난 것이다. 시장에서, 목욕탕에서, 계모임에서 세 명 이상만 모이면 신성우 얘기가 나온다고 할 정도로 주부들의 '오빠'가 된 그를 아줌마 팬들이 만났다.

"어머,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요." 지난 6일 오후 여의도 공원.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잔디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신성우를 보며 아줌마 팬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촬영 기간 내내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못 잤기 때문인지 그는 무척 지친 모습이었다.

출연제의 처음엔 거절

신성우=며칠 전에 퍼머를 했어요. 강준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이은주=드라마가 끝났지만 아직도 신성우씨 얘기를 많이 해요. 금희의 입술에 립스틱이 번졌을 때 조용히 닦아 주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모두들 낭만적인 연애나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신=아마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거예요. 제 홈페이지에도 주부들이 그런 글을 많이 올려주시더군요. 중년의 나이에 사랑을 잊고 살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이기까지 했나봐요.

김영미=드라마 출연은 처음이죠? 첫 드라마부터 이처럼 논쟁거리가 될 역할을 맡고 싶진 않았을 것 같아요.

신=TV 드라마 자체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어요. 뮤지컬은 매일 연습하고 리허설이 철저하기 때문에 무대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드라마는 촬영 속도가 빠르고 순발력도 필요해요. 감독님이 "강준하 역은 니가 딱이다"라고 얘기했지만 계속 거절했어요. 결국 못 이기고 출연하긴 했지만….

최윤정=드라마 속 여성의 삶이 개방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애인' 때만 해도 남녀가 결국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잖아요. '위기의 남자'에서 금희가 커리어를 쌓으며 홀로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드라마도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는 이혼녀도 사랑을 쟁취하는 분위기로 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저는 결말이 맘에 들어요. 도덕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 정도가 합리적인 수준인 듯해요. 강준하도 고민 많이 했을 거예요. 일방적인 사랑이라고 무시할 순 없잖아요. 부인인 나미에게 되돌아간 이유도 그것 때문이구요.

음악·연기 결국은 하나

최=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요?

신=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동태상자 메고 거칠게 살아갈 때요. 힘들긴 했어도 준하의 복잡미묘한 상황을 잘 표현한 것 같아요.

김=그간 음악·뮤지컬·연기자까지 두루 섭렵했는데, 어지럽지 않으세요?

신=(웃음) 기술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연기도 음악도 모두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만큼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아요.

신성우는 지난 몇년을 뮤지컬 무대에서 보냈다. '락 햄릿''드라큘라'에서 고민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런 그에게 TV 드라마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팬들은 옷매무새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열광했지만 연기면에서는 좀 어색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맡은 배역으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연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 자신감 때문인지 극 후반으로 가면서 연기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멜로+코믹영화 해볼계획

신=오늘 아침 거울을 보는데 내가 강준하라는 착각을 했어요.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내가 신성우인지 강준하인지 모를 때가 많았죠. 분장실에서 변정수씨를 만나면 아주 반가운데 스튜디오만 들어가면 나미로 보여서 단 몇초도 쳐다보기 싫더라고요.

김=드라마를 또 출연할 계획인가요.

신=하고 싶어요. 제가 소화해낼 수 있는 역할이면 무엇이든 좋아요. 망가지는 역도 해봐야죠. 올 하반기엔 영화에도 출연할 계획입니다. 아직 비밀이지만 멜로와 코믹의 중간쯤 되는 아주 쇼킹한 영화가 될거예요.

신성우는 수줍은 소년 같았다. 말을 그리 많이 하지도 호탕하게 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화가 무르익자 아줌마들의 질문 세례에 하나하나 즐겁게 답했다. 여러 장르를 오가니 어렵지 않느냐는 대목에선 "컵에 물을 따르다 다 차면 다른 컵에 물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받아넘겼다. 새로 시작하는 장르마다 점수를 잘 받을 것 같다며 "식당에 갔는데 밥이 맛없으면 그 식당 다시 가겠냐"라는 의미심장한 비유를 던졌다. 가히 모 방송사의 입담 좋은 축구 해설자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어느 새 젊은 시절의 캔디로 돌아간 아줌마들과 돌아온 테리우스의 데이트는 해질 무렵까지 계속됐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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