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과거史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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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독일에서 가장 큰 금기(禁忌)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20세기 독일 최고작가 중 한명인 마르틴 발저(75)가 이 금기를 깼다고 해서 독일사회가 온통 시끄럽다.

발저는 독일문단 최고의 비평가인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81)를 악의적으로 패러디한 소설을 최근 탈고, 이달 말 발간한다. '문단의 교황'으로 불리는 라니츠키는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인물이다.

발저의 신저 『어느 비평가의 죽음』은 문단을 쥐락펴락 하는 유대인 비평가 안드레 에를 쾨니히를 한 작가가 살해하는 줄거리다. '에를 쾨니히'(마왕)란 이름에서부터 적개심이 묻어나는 이 작품은 누가 보더라도 라니츠키를 모델로 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발저 자신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프랑크 쉬르마허 발행인이 공개서한을 통해 발저의 작품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발저는 "단지 비평가 얘기를 다뤘을 뿐 결코 반유대주의를 선동한 작품이 아니다"라며 쉬르마허의 공개 비난에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 당사자인 라니츠키는 "분노보다는 동정심을 느낀다"며 발저의 소설을 '가련한 작품'이라고 폄하했다.

현재 독일 지식인 대부분이 이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터부를 깨는 것은 반동"이라고 발저를 비난하는가 하면 작가 귄터 그라스는 "발저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라며 발저를 옹호했다.

그라스가 『게걸음으로 가다』란 소설로 그간 금기였던 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자로서의 독일인' 문제를 재조명하면서 시작된 독일의 과거사 논쟁이 최근 유럽사회 전반의 우경화 물결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거사와 관련한 터부가 잇따라 깨지고 있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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