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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백용호한테 배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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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책을 맡고 안 맡고를 떠나 새삼 백 청장을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인사 실험이다. 1년 전 MB는 국세청 개혁이란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당시는 전직 청장들의 비리와 안원구 국장의 미술품 강매 의혹으로 국세청에 온갖 비난이 쏟아질 때였다. 조직은 만신창이가 됐다.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누가 청장이 돼도 수습이 힘들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요즘, 국세청은 많이 달라졌다. 납세자 보호와 조직 안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평가를 안팎에서 받고 있다. 백 청장이 손댄 것은 인사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걸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이 다 아는 기본과 원칙을 지켰을 뿐이다.

그는 우선 청탁을 철저히 배격했다. 지난해 10월 인사 때는 국회의원 등을 통해 청탁한 6명을 모조리 승진에서 탈락시켰다. 조직이 약간 긴장했다. 그러나 이때까진 “더 지켜 보자” 정도였다. 신참 청장의 군기 잡기란 시각이 많았다. 두 달 뒤인 12월 과장 승진 인사도 원칙대로 했다. 청탁의 흔적만 보이면 모조리 불이익을 줬다. 비로소 조직에 긴장감이 돌았다. 급기야 지난달 30일 고위직 인사 때는 청탁이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과감한 권한 위임이다. 그는 지난해 지방 청장들에게 인사권을 대폭 넘겼다. 국세청이 생긴 이후 처음이다. 대신 내부 감찰을 강화했다. 지방 청장들이 추천한 인물 중 인사권 남용이나 문제가 발견되면 탈락시켰다. 국세청 관계자는 “소신·책임 인사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장 때도 권한 위임으로 재미를 봤다. 잘 모르는 일은 확실하게 부하 직원에게 맡겼다. 대신 외압은 철저히 막아줬다. 덕분에 공정위는 10년간의 반기업 이미지를 쉽게 벗었다. 권한을 하도 넘겨주다 보니 한때는 “부위원장이 위원장을 제치고 공정위를 다 말아먹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마지막은 자기 사람 안 쓰기다. 취임 직후 세무서 초도순시(初度巡視) 때 일이다. 첫 방문지가 하필 고등학교 후배가 서장으로 있는 세무서였다(백 청장은 전북 익산 남성고를 나왔다). 국세청의 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순시를 마치고 그는 화를 벌컥 냈다. 당장 그런 관행부터 깨라고 했다. 얼마 뒤 그 후배 세무서장에게서 편지가 왔다. 청장에 대한 구구절절한 충정과 함께 자신이 원하는 보직을 1순위, 2순위, 3순위 식으로 적었다고 한다. 백 청장은 이 편지를 올 1월 전국세무서장 회의에서 공개했다. 후배가 원한 1, 2, 3순위 자리 중 어느 하나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는 공정거래위원장 시절부터 “이방인이 조직을 장악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자기 사람을 안 쓰고 공정 인사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국세청장이 된 후에도 이 원칙을 지킨 셈이다. 결과는 대만족. 요즘엔 누가 “청장에게 잘 말해주겠다”고 하면 간부들이 손사래부터 친다고 한다. 세정(稅政)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다.

요즘 MB는 집권 후반기 인사 구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전면 개편부터 조각 수준의 개각 얘기도 나온다. 선거 후 민심 수습이 목적이라면 많이 늦었다. 잘해야 본전이요, 잘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다. 그래도 이왕 할 바엔 제대로 해야 한다. 백용호의 실험이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나라를 국세청으로 바꿔 놓으면 해답은 간단하다. MB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측근 빼고 청탁 안 받고 믿고 맡기고. ‘절친’ 백용호가 한 걸 MB라고 왜 못하겠는가.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