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이 나를 막아도 희망의 3점슛을 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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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9면

이 원우(44)씨. 농구 팬이라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딱히 열혈 팬이 아니라도, 이충희·박수교씨 등과 함께 1980년대 농구 코트를 누비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명 가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이원우씨가 암, 그것도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꼭 그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 병에 걸린 게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운동장이나 코트를 펄펄 날아다니던 운동 선수가 쓰러질 경우 유난히 더 그런 것은 인지상정이다.

지난 7일 서울 상계동 미도파 백화점 9층 커피숍.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그는 동갑의 부인 박혜숙씨와 함께 팥빙수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의 그는 매우 건강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두번이나 대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환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잇는 데 힘들어 했고 정확한 단어를 쉽게 입 밖에 내놓지 못해 답답해했다. 뇌수술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이심전심의 부인 박씨가 얼른 알아채고 말해주는 등 인터뷰를 도왔다.

그가 코트를 떠난 것은 94년. "한 2~3년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여의치 않았다. 모두들 그가 지도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회사원의 길을 택했다.

당시 그가 소속돼 있던 실업팀 현대 농구단에 빈 코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곳은 현대 그룹의 홍보실. 평생 운동, 농구밖에 모르던 그에게 코트가 아닌 사무실, 농구공이 아닌 책상은 낯선 것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각 신문·방송의 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점차 '홍보맨'으로서의 삶에 익숙해지던 무렵,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코트를 떠나 홍보실로 옮긴 지 다섯달 만이었다.

"퇴근 길이었어요. 피로를 풀기 위해 회사 부근 대중 목욕탕에 들렀지요. 그곳에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아요. 병원에서 정신을 차려서야 비로소 제가 정신을 잃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언제나 건강했고 몸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던 그였기에 그날 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부인과 함께 병원을 찾아 통보받은 검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뇌종양. 그것도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의사는 그 상태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여덟시간의 대수술을 받았고 보란 듯이 일어났다.

"다시 농구공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전고 코치로 자리를 옮겼지요." 하지만 그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될 무렵, 그는 다시 농구 공을 놓아야 했다. 암이 재발했던 것이다.

"솔 직히 첫 수술 때는 별로 두렵지도 심각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두번째는 다르더군요. 비로소 내가 암이구나,이제 다시 코트에 서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절망스러웠습니다."두번째 수술은 훨씬 어려웠고 후유증도 남았다. 언어 장애가 찾아온 것이다. 부인의 이름도, 부모님의 이름도, 주변 사물의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그의 언어 능력은 거의 유아 수준이었다고 한다.

"모든 단어를 다 잊어버린 것 같았어요. 재활 교육을 시작한 초기에는 수박·사과·바나나라는 과일 이름도 제대로 댈 수 없었으니까요. 수술 직후엔 저를 근심스럽게 쳐다보는 이가 집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집사람의 이름도 기억이 안나고 또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호칭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많이 힘들었죠."

그 와중에도 이씨는 스포츠 특히 농구와 관련한 단어들은 모두 기억했다고 부인 박씨는 말했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어요. 어떻게 다른 단어는 말하지 못하는데 농구와 관련된 것은 고스란히 다 기억하는지. 역시 이이에겐 농구밖에 없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는 한 대학병원의 재활원에서 언어 교정 훈련을 받았다. 바로 그때 장애인 선수들로 구성된 휠체어 농구단 '서울 비전'을 만나게 됐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들이 휠체어에 의존해 농구를 하는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야,이들도 농구를 하는데 내가 못해서야 되겠는가,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는 휠체어 농구단 '서울 비전'의 무보수 지도를 자청했고 결국 '서울 비전'의 감독으로 코트에 돌아왔다. "코트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집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코트에 서있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좋아하거든요."

부 인 박씨와는 83년 결혼했다. 두 사람의 부친이 절친한 친구였고,부친끼리 "우리 사돈 맺자"고 먼저 약속했다고 한다. 부친들의 소개로 만난 지 한달 만에 약혼했고 다시 한달 만에 결혼했다. 이들은 1남 1녀를 뒀다. 큰 딸 혜민(19)은 유학 중이고, 아들 현수(14)는 중학교 1학년이다. 아들 현수 역시 농구 선수다. "아직 몸집이 작고 '악바리'같은 근성이 부족해 걱정이지만 농구를 좋아하니 하고 싶어 하는 한 밀어줄 생각"이라고 이씨 부부는 입을 모았다.

이씨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고 있고 약을 먹으며 투병 중이다. 하지만 이씨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농구공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은 지금 8월에 일본에서 열릴 휠체어 농구 세계 대회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하다. 좋은 성적을 올려 '서울 비전'선수들과 그 자신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주고 싶은 것이다.

'서울 비전'을 지도하는 것은 이씨지만 이씨를 지탱해주는 것은 농구였다. '서울 비전' 사무실 02-3476-3000.

최재희 기자

은퇴 후

홍보맨으로 변신한

그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두 번의 대수술.

후유증으로

한때 부모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농구용어만큼은

고스란히

기억에 남았다.

농구가 인생의

전부.

그후 재활원에서

휠체어 농구단을

만난 게 인연이 돼

감독까지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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