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조달물품이 명품이 돼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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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조달청이 운영하는 ‘나라장터’라는 전자조달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가격경쟁 시스템이다. 개인이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살 때는 가격과 품질을 동시에 고려한다. 그러나 조달 수요기관들은 제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1차적인 관심은 가격을 예산에 맞추는 데 있다. 계약 주무기관인 조달청마저 가격경쟁에만 매진한다면 우리 상품의 품질개선은 누가 이끌 것인가?

수요기관들도 속으로는 ‘품질 좋은 제품’을 원하고 있다. 이제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저급’이라는 조달물품의 불명예를 탈피할 시점에 와 있다.

가격경쟁과 저가낙찰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기술력이 뒤지는 제조업체들이 가격으로 밀고 오기 때문에 우수제품의 설 땅이 점차 좁아지고 있다.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하려면 품질과 기술개발을 통해 한 단계 비약하는 ‘퀀텀 점프(quantum jump)’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저가경쟁으로는 세계시장에서 이길 수 없다. 나아가 저가경쟁을 하면 외국산 원부자재 제품들이 우리 공공시장을 넘보게 된다. 공공기관이 국민 세금으로 외국 제품을 구매하고, 해외고용을 촉진해 주는 결과가 된다. 독일시장에서는 외국의 저가제품들이 품질의 위해성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느 나라나 공공기관이 구매할 때에는 자기 나라 제품을 우선 구매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은 외국 제품을 차별적으로 불리하게 대우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품질관리를 엄격하게 해서 저질품을 골라내는 일은 구매계약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명품양성학교 프로그램’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에는 부실업체의 납품 등록을 계속 취소시키고 있다. 외국산 제품을 국산으로 속여 조달시장에 납품하는 불법 제조업체는 더 이상 발을 못 붙이게 하고 있다. 앞으로는 납품업체들이 기술개발을 중시하도록 6개월 또는 1년 후의 ‘최소 구매규격기준’을 예고할 계획이다. 올해에는 30개 품목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2013년까지 100개로 늘릴 예정이다. 또한 품질, 납기 준수, 고객만족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부실업체는 퇴출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조달물품의 품질을 ‘필터링’하는 명품양성학교는 우리 경제의 체질강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품질개선을 열심히 하는 기업은 명품양성학교에 모두 합격할 수 있도록 전형기준을 단계적으로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명품을 필요로 하고 있고, 명품만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조달청에 납품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품’으로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 구찌, 베르사체 등 명품들이 패션계를 주도하듯이 명품양성학교의 졸업생들이 세계 공공조달시장을 지배하는 미래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노대래 조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