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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브를 꿈꾸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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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 텍사스 주도(州都) 오스틴. 다운타운에 들어서면 분홍색 화강암으로 된 텍사스 주의사당 건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높이가 95m다. 미국 내 50개 주의사당 건물 중 가장 높고 워싱턴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보다도 약 7m 높다. 주의사당 오른편으로는 백악(白堊)의 주지사 관저가 자리잡고 있다. 10년 전 조지 W 부시와 선거참모 칼 로브의 워싱턴을 향한 꿈의 여정이 시작된 곳이다.

주의사당 앞으로 곧게 뻗은 콩그레스 애비뉴. 길 양편으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다. 입주해 있는 업체들 가운데 '아무개 PR'이니 '아무개 컴퍼니'니 하는 알쏭달쏭한 이름의 회사들이 눈에 띈다. 정치 컨설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다. 한 PR업체 대표에 따르면 오스틴에만 이런 회사가 10개쯤 된다고 한다. 컨설팅이라니까 거창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선거운동 용역업체들이다. 주지사에서 텍사스 출신 연방 상하원의원, 주 상하원의원, 각종 주정부 선출직까지 표를 다투는 모든 선거가 이들의 업무영역이다.

한때 오스틴에서 제일 잘나가던 정치 컨설팅 회사가 '칼 로브 앤드 컴퍼니'였다. 1981년 선거용 디렉트 메일(DM)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출발, 전국 굴지의 선거 용역업체로 성장했다. '칼 로브가 맡으면 이긴다'는 평판이 쌓이면서 텍사스 내 공화당 후보들의 선거운동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로브는 "수입 중 60%가 우표 값"이라며 엄살을 떨기도 했지만 큰돈을 번 것으로 전해진다. 2001년 부시를 따라 백악관으로 입성하면서 로브는 수백만달러를 받고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미국에서 정치 컨설팅업이 신규 성장업종으로 각광받고 있다. 주정부 수도가 있는 곳치고 정치 컨설팅 업체가 없는 곳이 없다. 당연히 연방정부 수도인 워싱턴에 가장 많이 몰려 있다. 로비스트들의 메카인 워싱턴 K 스트리트에만 1000여명이 활동하고 있고, 미 전역에서 선거용역업에 매달려 있는 고급 인력이 7000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제2의 칼 로브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뉴욕대학과 아메리칸대학 같은 곳은 아예 대학원 과정으로 정치 컨설팅을 개설해 놓고 있다.

정치 컨설팅 업종도 전문화하고 있다. 여론조사와 정치홍보 기법이 고도화하면서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홍보전략과 전술을 찾아내는 단계로 진화 중이다. 일괄용역 방식도 등장하고 있다. 될성부른 후보를 컨설팅 업체에서 먼저 찾아내 정치헌금 모금에서 유권자 관리, 매체광고, 대(對)언론 홍보 등 선거운동의 전 과정을 일괄해서 대행해 주는 서비스다. 칼 로브는 백악관에서 정부 월급을 받아가며 애프터 서비스까지 해주고 있는 특별한 케이스다.

세상만사 다 그렇듯 정치 컨설팅 업종에도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돈이 없어도 능력만 있으면 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밝은 점이다. 선거꾼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탈피, 선거운동의 과학화와 전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점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표만 모으면 된다는 생각이 판치다 보니 유권자가 정치공학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점은 문제다. 유권자는 바보가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2008년 대선을 노리는 미 공화당 주자들은 칼 로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가 낙점하는 인물이 차기 대권주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의 마키아벨리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미국만의 얘기는 아닐 성싶다.

배명복 순회특파원 <오스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