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제2부 薔薇戰爭제4장 捲土重來:무주에 無血入城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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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달 뒤인 민애왕 원년 3월.

마침내 오천명의 대군이 출병을 떠났다.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며,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此除舊布新 報寃雪恥)군사'라 하여 군사이름을 동쪽을 평정할 군대,즉 평동군(平東軍)이라 하였다.

물론 김우징이 그 군사의 총사령관인 대장군에 올랐으나 실제로 군사를 이끄는 장군은 김양이었다.김양은 스스로 평동군을 이끄는 장군이라 하여서 자신을 '평동장군'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평동군의 수장은 장보고가 임명한 정년이었다. 수장 밑에 다섯명의 효장이 있었는데 이는 장변(張弁), 낙금(金), 장건영(張建榮),이순행(順行)등이었고 김양의 심복부하로는 염장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장보고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만명의 군사 중 반수인 오천명의 군병을 빌려주었다고는 하지만 그 중에는 김양의 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일종의 연합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 평동군은 우선 무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김양이 첫번째 공격 대상지로 무주를 선택한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신라의 조정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대구를 거쳐 서라벌을 진격해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으나 처음부터 관군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김양이 이끄는 평동군이 '군객(軍客)이 매우 성할 정도'로 강병이긴 하였지만 신라의 관군 역시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신라의 조정이 쇠퇴기에 이르렀으나 김대문(大問)이 지은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화랑도를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평한 것처럼 신라의 중앙군은 아직도 화랑들이 이끄는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어 정면으로 이들 관군과 맞붙을 때에는 자칫하면 참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중앙군은 9개의 당(幢)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투에 경험이 많은 정예군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양은 우선 가까운 무주를 점령함으로써 평동군에게도 전투능력을 키워주는 한편 신라의 조정을 압박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는 뜻'으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심장부인 서라벌로 쳐들어 갈 것 같은 위협을 가하면서 실제로는 정반대인 무주를 공격하여 점령할 수만 있다면 우선 심리적으로 신라의 조정을 고립시킬 수 있다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더구나 무주는 김양이 수년간 도독으로 있었던 곳.만약 김양이 무주를 점령할 수만 있다면 일단 거점을 마련하게 됨으로써 장보고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리한 협상을 진행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김양이 이끄는 평동군은 무주를 습격하였으나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 무렵 무주의 성곽은 지방군이었던 정(停)이라는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으나 김양이 이끄는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였던 것이었다. 무주의 성민들은 마음 속으로 정무의 명성이 높았던 김양을 존경하고 있었으며 특히 무주에 살고 있던 김양순(詢)은 김양의 심복부하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시켜 성문을 열도록 명령하였던 것이었다.

이로써 김양이 이끄는 평동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입성하였다.

이때의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강병 5천인으로서 무주를 습격하여 성하(城下)에 이르니 고을사람들이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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