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트랜드&이슈] "불황 덕분에…" 쑥스러운 호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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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벼운 발걸음. 가게가 수시로 문을 닫고 또 연 덕에 '청지기 디자인'처럼 재미 본 간판 업체도 있다. 권혁재 전문기자

'불황'이란 말을 지겹도록 들어온 한해. 자연히 시민들의 생활에도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일명 '짠돌이' 생존법. 목돈 들여 구입하기보다 빌리고, 비싼 헬스클럽이나 골프장 대신 산을 찾으며, 의식주에서 먹는 것 빼고 일단 지출 동결이다. 이 같은 풍속도에 기댄 '반짝' 호황도 나타났다. 등산용품.렌털.리모델링 업계 등. 그렇다고 박수 치기는 좀 멋쩍다. 이들의 성장 발판이 불황이기 때문이다. 올해 잘 나간 업종.업체를 살펴보고 그 이유를 들여다봤다.

◆등산용품 - 매출 30% 껑충

지난 가을 백화점 정기세일 품목에서 빠진 게 있다. 등산용품이다. 잘 팔리기에 굳이 할인 판매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스포츠의류 리클라이브의 전상석 이사는 "옷과 신발만 갖추면 다음부터는 돈이 거의 들지 않는 운동이 등산 아니냐"고 했다. 필드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보다 산에 오르며 등산용 지팡이를 빙빙 돌리는 것이 돈도 덜 들고 운동 효과가 훨씬 크다는 얘기. 전 이사는 "이런 추세에 따라 등산용품 업계는 30%의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말이면 웬만한 등산로는 '보행 체증'을 빚었다. 북한산의 1~11월 입장객은 512만명. 지난해( 445만여명)보다 15%가 늘었다. 설악산 등산객도 10% 늘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사무소 이지희씨는 "도시락을 싸오는 등산객이 늘고, 산 속 매점 가운데 어디가 물건 값이 싼지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고 오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렌털업계 - 가전제품가구까지

렌털업체 '렌털엔조이'는 최근 러닝머신을 추가 구입하기로 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20대만으로는 빌려 쓰려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러닝머신 대여료는 한달에 7만원 내외. 동네 헬스클럽 한달 이용료 수준이다. 이 회사 정기범 경영지원팀장은 "원룸에 사는 '싱글족'을 중심으로 TV.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빌리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렌털협회에 따르면 올해 30% 정도 성장했다. 렌털은 목돈이 들어가지 않는 데다, 빌려 쓰다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반납하면 그만이다. 협회의 전성진 사무총장은 "침대.소파.책장 같은 가구까지 새로운 수요가 생기고 있다"며 "비싼 제품을 빌려 한달쯤 써 보고 살까 말까 결정하는 '신중파'들이 늘어난 것도 업계 성장에 한몫 했다"고 말했다.

◆홍초불닭·레드망고 - 프랜차이즈 줄서

부익부 닭요리 전문점 홍초불닭, 요구르트아이스트림 매장 레드망고가 그랬다.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프랜차이즈 지원자가 몰렸다. 신규 창업자나 전업자들이 위험 부담을 덜려고 '잘 나가는' 곳으로 쏠린 것이다. 그 덕에 두 업체는 지난해까지 전국 40여 곳이던 매장을 올해 140여 곳으로 늘렸다. 홍초불닭 관계자는 "쏠쏠한 곳은 거의 다 가맹점이 들어선 상태"라고 말했다. 레드망고는 하도 전화가 울려대는 통에 직원들이 "시끄러워 일을 못 하겠다"고 불평, 상담팀 사무실을 건물 내 다른 층으로 옮겼다. 이경희 창업전략연구소장은 "잘 나가는 프랜차이즈도 경쟁 업체가 생기면 이내 사양길로 접어들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음식 프랜차이즈라면 요리 비법을 쉽게 흉내낼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충고했다.

◆리모델링 간판 업계 - 밀려드는 일감

점포 리모델링 업체나 간판 제조업자도 일부 재미를 봤다. 곳곳의 업소들이 줄지어 폐업 또는 전업하거나 주인이 바뀌어 '신장개업'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전담회사인 미가인텍은 밀려드는 주문에 일손이 달려 5명이던 직원을 올 들어 14명으로 늘렸다. 간판을 만드는 청지기디자인은 올해 매출이 지난해의 두배다. 하지만 이익은 외형만큼 나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리모델링하는데 찬장 하나 공짜로 짜달라, 간판 만드는 김에 신장개업 현수막 좀 서비스해 달라는 '비용 절감' 요청이 부쩍 늘어서란다.

최민우·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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