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네쌍의 사랑' 고전 재현에 매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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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모차르트의 오페라'피가로의 결혼'은 네 쌍의 남녀가 그리는 사랑의 쌍곡선이다. 베를린 도이체 오퍼가 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의 3막 결혼식이 이를 잘 말해준다.착각과 혼동으로 뒤범벅이 되는 4막을 예고하듯 피로연 무도회에서 파트너가 종횡무진으로 바뀐다.

1978년 괴츠 프리드리히(1930~2000)의 연출로 초연된 도이체 오퍼 프로덕션은 세부 묘사가 선명해 작품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이 음악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베를린 도이체 오퍼가 해외공연 작품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선호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10명의 주역가수가 드라마를 이끌어가고 3~4막에 잠시 등장하는 합창단은 '아이다'처럼 대규모 인원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편성이 단출한 것은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피가로'는 도이체 오퍼의 살아있는 전설인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이 아닌가.

게를린데 펠코브스키가 재현한 프리드리히의 연출은 자연스런 제스처를 통해 가사의 속뜻을 충분히 전달해주었고 무대장치와 의상도 공들여 제작한 흔적이 역력했다. 노래 자체로 따지자면 국내 정상급 성악가의 실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주역 가수들의 앙상블은 탄탄했지만 한 명씩 놓고 보면 '베스트 멤버'는 아니었다. '세계 3대 오페라단'이라는 선전 문구가 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연기로 만들어낸 생동감 넘치는 무대만으로도 오페라를 보는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지휘자와 합창단·오케스트라는 화려한 팀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93년 '루치아'이후 9년만의 고국 오페라 무대라 남다른 관심을 모은 소프라노 신영옥은 활달한 연기를 펼쳤지만 수잔나로 완전히 변신하지는 못했다. 성격이나 음색 면에서 수잔나는 스스로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자연스런 역할은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레퍼토리에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한국 성악가를 포함시켜 마케팅에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술적 성취감을 맛보기에는 미흡한 무대였다. 단순히 고전의 충실한 재현이었을 뿐이다.

예술의전당이 막대한 국고를 지원받아 월드컵 문화축전 참가작으로 제작한 무대라면 국내 초연을 감행했더라면 어땠을까. 국내 최고의 공연장이 초청한 세계적인 오페라단의 무대라면 충분히 욕심을 부릴 만하다. 공연은 25일까지(22일은 휴관). 공연개막 오후 7시30분.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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