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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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흙먼지 정겨운 산길 들어서면

세월을 비켜 선 작은 마을 있지요

검푸른 물이끼 미끈거리는 실개천따라

꽃잎들 지천으로 떠내려와 숨고르는 거기,

사람은 없고 빈집만 남아 하루종일

햇빛과 바람 숨바꼭질 하고

앵두꽃 하염없이 꽃피우고 서서

제 그림자 지우지요

흰 눈같이 눈부신 꽃잎을 슬픔처럼 달고

봄날 향기에 취해 저물고 있지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 옛날 꽃그늘 밑에서

누군가 말했지요

봄날은 짧고 사랑은 꿈처럼 지나간다고

-최춘희(1956~ )'꽃잎을 슬픔처럼 달고'중

앵두꽃 피고 지듯 매혹은 짧고 환멸은 길다. 세상의 모든 인연이 끊어진 그 자리에 쓸쓸히 서있는 앵두나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옛사랑 같아 시인은 물보다 먼저 흥건히 젖는다. 고독은 때로 지는 꽃을 바라보며 씹는 생각 같은 것. 꽃잎처럼 슬픔을 달고 서성이는 것. 종이꽃을 접어두고 이제 그는 산 꽃에 취해 햇빛과 바람 속에 마음을 말리고 있다.

천양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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