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헌법재판소의 무거운 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2004년은 '헌법재판소의 해'였다. 아홉명 재판관의 힘이 그렇게 셀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헌법)재판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오는 것인가.

이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사법부의 힘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근래 외국에서 출간된 책들의 제목만 보더라도 이 점은 곧 드러난다. '사법통치(Juristocracy)'라는 신조어가 자주 사용되는가 하면 '판사들의 지배'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도 보인다. '사법 제국주의'라는 극렬한 말도 흔히 쓰이고 있다.

사법의 힘이 세진 것은 특히 헌법재판제도 때문이다. 헌법재판의 핵심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위헌법률심사제인데, 국민 대표자들이 만든 법률을 뒤엎을 수 있는 제도인 만큼 이 제도 자체가 예사 제도가 아니다. 위헌법률심사제가 처음 생긴 것은 19세기 초 미국에서다. 헌법에 규정이 없지만 대법원 스스로의 판례에 의해 시작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등 몇 나라에서 헌법재판소라는 별도의 기관을 만들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폐지되고 말았다. 2차 대전 종전 당시 위헌법률심사제를 갖고 있던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세 나라(미국. 노르웨이.아이슬란드)에 불과했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 헌법재판소가 설치되기 시작했고, 그 후 헌법재판 제도가 세계적으로 번진 것은 1970년대부터다. 전 지구적 차원으로 민주화 물결이 퍼지면서 이와 더불어 곳곳에 헌법재판소가 도입된 것이다. 오늘날 헌법재판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의 수는 80개 이상에 이른다.

헌법재판제도가 세계적으로 확산돼가면서 새로운 현상과 문제들이 생겨났다. 정치적 갈등이 사법부로 옮겨지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와 함께 '사법의 정치화'가 뒤따랐다. 의회의 입법에 대한 위헌 판결을 불사하는 '사법 적극주의'가 미국만이 아니라 다른 민주국가들에도 퍼져갔다. 그러자 논쟁이 벌어졌다. '헌법재판의 적절한 정치적 역할은 무엇인가'. 한쪽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법 적극주의는 의회의 권력을 사법부가 빼앗아 가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반(反)민주적이다. 이런 견해의 대표자라 할 미국의 법률가 로버트 보크는 사법 적극주의를 가리켜 '판사들에 의한 쿠데타'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그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됐지만 너무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상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반면 적극주의 옹호론자들은 적극주의가 결코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증진시킨다고 반박한다. 의회는 파당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소수자 보호라는 관점에서 의회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헌법재판제도가 지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법 적극주의는 오늘날 세계적 흐름이며 그 밑바탕에는 개인의 권리의식 팽창과 의회권력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다른 여러 나라처럼 우리의 헌법재판소 역시 민주화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그간의 적극주의적 결정들로 인해 이미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헌법재판을 성공 사례의 하나로 꼽아 왔던 터이다. 거기에 더해 얼마 전의 수도 이전 위헌결정으로 한국의 사법 적극주의는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게 됐다. 집권세력의 핵심적 이해관계 영역에서까지 위헌결정을 마다하지 않기에 이른 것이다. 이 결정이 내려진 후 이런저런 반발이 뒤따르고 얼마간의 긴장감도 흘렀지만 그만한 정도로 마무리되어 가는 것은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결정에 대한 찬반을 떠나 한국의 법치주의가 한 단계 올라섰다고 자평해도 좋지 않은가.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일 것이다. 앞으로의 헌법재판소 결정에서 그 정당성을 뒷받침할 논증의 부담이 더 무거워졌다는 말이다. 헌법 판단에는 불명확한 영역이 넓게 남아 있고 궁극적으로는 가치의 선택이 관건임을 모든 국민이 알게 됐다. 재판관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가치가 그들 자신의 주관적 가치가 아니라 헌법 속에 있는 국민적 가치임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2004년은 헌법재판소가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해이기도 하다.

양건 한양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