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개인정보 줄줄 새 은행송금 사기 급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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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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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마모토(熊本)현의 60대 여성은 지난 7일 갑자기 걸려온 전화의 내용에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약을 잘못 처리해 환자가 죽었다"며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성은 간호원인 딸이 떠올랐다. 곧 바로 "딸이 의료사고를 일으켰다"(원장), "화해금 1500만엔(약 1억5000만원), 변호사 비용 300여만엔이 필요하다. 원장이 1200만엔을 내니 나머지는 당신이 내라"(변호사)는 전화를 받았다. 급한 마음에 변호사가 말한 은행계좌로 600여만엔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사기당한 것을 알았다.

#2

도쿄(東京)의 50대 주부는 지난 10월 변호사라고 밝힌 남자로부터 "홍콩에 있는 당신 딸이 교통사고를 냈으니 보상금을 보내라"라는 전화를 받았다. 실제로 딸은 외국기업의 홍콩지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확인해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일본에선 이같이 전화 등을 이용한 '은행 송금 사기'가 크게 늘고 있다. 올해 1~10월에만 2만830건(미수 포함)의 은행송금 사기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222억엔에 이른다. 송금 사기가 급증하는 것은 여러 기관에서 개인정보가 불법 유출되고 있지만, 정부의 관리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이 개인정보를 악용, 가족 이외에는 알기 힘든 정보로 접근하면 노인들이 쉽게 속는 것이다.

?개인정보 유출.판매=인터넷 서비스 '야후'를 운영하고 있는 소프트방크BB는 지난 16일 "회원정보 9213명의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올 7월 이후 컴퓨터 도난.분실 등으로 보험업계에서 유출된 개인정보만 1만8000건 이상"이라고 지난 12일 보도했다. 대학 졸업생, 각종 모임 회원, 대기업의 고객 설문조사지 등도 나돌고 있다. 설문조사지에는 응답자의 신상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다. 명부 브로커는 "대기업 사원 등이 설문조사지 등을 팔러 오는 경우가 많아 명부는 언제든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지난 12일 "도쿄(東京)도내 명부 전문점들은 전국 대학졸업생 명부부터 각 마을(町) 내 모임 명부까지 취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넷에는 '명부 재고 있다'는 선전문구와 함께 이런 저런 명부가 올라 있다. 가장 비싼 것은 '특수 명부'로 불리는 통신판매 구입자, 유료사이트 등록자 명부다. 통신판매(DM)로 고객을 확대하려는 기업들이 많이 구매하고 있다. 가격은 정보 대상자 한 명당 20~80엔이다.

?정보관리 허점=유출된 정보가 사기에 악용되고 있지만 대책은 소홀하다. 오사카(大阪) 경찰은 지난 10월 '은행 송금 사기'를 하던 남자를 검거했다. 남자의 차에서 14개교 대학의 졸업생 명부가 발견됐다. 인터넷에서 팔리는 명부에선 사기 피해자의 리스트도 발견됐다. 명부 사기는 올해 급증했다.

그러나 일본엔 개인정보 판매를 금지하는 법률이 없다. 니혼게이자이는 "범죄에 이용될 것이란 걸 알고 정보를 팔면 처벌할 수 있지만, 단순 판매는 문제없다"고 지적했다.

경제산업성 관계자는 "명부 판매가 악질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 금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객 개인정보를 유출한 기업 관계자를 처벌하는 '정보 절도죄' 의 신설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내년 4월이 돼야 '개인정보 보호법'이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그러면 고객 5000명 이상의 명부를 갖고 있는 민간기업은 고객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행정기관에는 2003년부터 적용됐다. 하지만 처벌조항이 미약해 효과는 미지수다. 6개월 이하 징역이나 30만엔 이하의 벌금이다.

오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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