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시선으로 詩 100년史 알짜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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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이 땅에 이렇게도 절실하게 슬픈 시가 나왔다. 이 시의 서정은 김소월의 그것과는 물론이고 윤동주의 그것과도 사뭇 다르다. 이 시의 서정은 쉬르를 경과한 뒤에 나타난, 나타날 수 있었던 그런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한(나열된) 장면들은 일종의 콜라주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기발하면서 적절하다. 이런 현상은 시작 방법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감수성 문제이기도 하다.

기형도의 감수성은 이미 19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그의 시는 국제적인 수준에서도 현대시에 속한다. 게다가 빼어난 현대시의 한 견본이 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김춘수 사색사화집』 중에서

원로시인 김춘수(80)씨의 존재는 그 자체가 한국 현대시의 역사, 나아가 세계 현대시사다. 지난 50여년간 김시인은 19권의 시집을 펴내며, 현대시의 모든 사조를 실험하며 시는 곧 세속적 인간의 구원이자 해탈이라는 경지까지 보여줘 왔다. 팔순이 지난 지금도 그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팽팽한 긴장으로 시의 극치를 보여주며 일상에 갇힌 우리의 삶을 우주와 영원으로 풀어놓고 있다.

그가 한국 현대시 1백년을 대표할 시 50여편을 선정해 한편마다 해설을 곁들인 『김춘수 사색사화집』 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일종의 실천비평"이자 "작품 검증을 통한 한국의 당대 시사(詩史)"(서문)라 할 정도로 이 책이 새로운 느낌의 사화집(詞華集·시선집)이기 때문이다.

팔순에 내놓은'실천비평'

여러 출판사가 한국 대표 명시 선집을 많이 펴냈고 시중 서점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으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비평적 일관성과 엄밀성 아래 선정 이유까지 설명하며 대표시를 추리고 거기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체험적인 해설을 붙인 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인의 고통과 실감으로 쓴, 사료(시)의 짜깁기가 아니라 명확한 사관(史觀)을 지닌 '한국현대시 1백년사'로 읽힐 수 있다.

김시인은 한국 현대시를 크게 ▶전통 서정시▶피지컬한 시(상징주의 시)▶메시지가 강한 시▶현대성과 후기 현대성을 지향한 시 등 네 가지 계열로 나눈다.

그렇다면 김시인의 일관된 비평적 관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네 가지 시적 경향에 대한 개괄적 해설에서 엿볼 수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막상 챙겨보니 좋은 시는 그 수가 적었다"하고 피지컬한 계열은 "좋은 시가 의외로 많았다"고 설명한다. 또 메시지 쪽은 "수가 많으나 시로서의 균형이 잡히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고 한다. 넷째 실험시 계열은 "작품의 질보다는 실험성이 강하고 시사적(詩史的)의의가 뚜렷한 것을 뽑았다"며 긍정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김소월부터 기형도까지

실험시의 극단인 '무의미시'를 주창한 김시인의 관점에 따른 입장 표명이 생생하게 노출돼 있는 것이다. 피지컬한 시는 언어 자체가 목적인 시, 이데올로기로부터 언어를 구출하려는 시다. 다시 말해 언어란 의미를 담은 그릇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통념(서정시·참여시)에 반대해 언어 자체가 목적이고, 설명과 관념을 배제하고 날 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적 경향이다. 이는 시로서 시 자체의 왕국을 구현하고자 하는 그의 극단적 순수시 지향의 결과다.

따라서 그는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의 이장희에서 맹아틀 틔우고 정지용에서 결실을 본 모더니즘 시(둘째 계열)에 미학적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이런 비평적 일관성은 다른 계열의 시를 설명할 때도 통용된다.

예컨대 김수영의 시 두 편(메시지)을 평한 것을 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십오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의 '풀'보다 훨씬 못하다고 단언한다. '풀'이 이미지를 통해 외연과 내포의 긴장관계를 느끼게 한다면 '고궁'은 메시지만 과도하게 노출돼 "행을 갈라놓은 산문(진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시에 대한 깊은 관조 끝에 도달한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과 시를 통해 큰 깨달음에 이른 대가의 풍모를 보는 데도 있다.

"서정시의 본질은 안타까움의 정감을 일깨워주는 데 있다" "죽음이란 열반의 세계에서는 한 모서리에 지나지 않는다"와 같은.

한국 현대시가 이제 1백년을 맞아가는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됐다는 것도 뜻깊다. 더구나 올해는 전통 서정과 모더니즘의 두 갈래 길에서 우리 현대시의 초석을 닦은 김소월과 정지용 시인의 탄생 1백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시적 입장에 따라선 김시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이 아닌 본질에 대해서는, 나아가 본질이 곧 효용을 포괄하고 있음을 깨닫는 데 이르면 다음과 같은 김시인의 말에 결코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시의 효용은 빵과 달라

"시의 효용은 빵의 효용과 다르다. 빵이 절실히 요구될 때 시를 입에 넣어주는 일은 잔인하다. 그러나 시를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된다. 시는 예술이고 평화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평화가 없는 곳에 예술, 즉 시는 없다. 예술, 즉 시에서는 슬픔도 때로 아름다움이 된다."

일제와 분단으로 얼룩진 역사와 함께 한 1백년 한국시의 효용도 이제 그 본질을 찾자는 것이다. 시를 시로서 대접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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